[릿묘] 화보 사진

<span class="sv_member">린더</span>
린더 @frauroteschuhe
2026-08-11 20:27

ES 빌딩, P기관 사무실. 


나이츠 화보의 프로듀싱을 맡은 히메사키 미오는, 메일로 온 화보 사진을 다운로드 받아 정리하다 자신의 사진을 발견했다. 


‘따로 보내주실 줄 알았는데.’


마스크가 마음에 든다며 사진작가가 미오에게 제안해 찍은 사진이다. 급하게 화보용 화장을 하고 스튜디오의 드레스와 진주 액세서리를 빌려 착용해서 그런지, 역시 스타일링이 착 붙지는 않는다. 


‘잘 나왔지만, 역시 연예인과는 다르네. 리츠 씨 쪽이 훨씬 예뻐.’


그렇게 생각하며 사진을 지우려는데, 누군가가 마우스를 쥔 손을 잡아왔다.


“지우려던 거야?”


보드랍고 느슨한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마우스를 쥔 손 위에 제 손을 겹친 리츠는 다른 손으로 화면을 톡톡, 가볍게 두드렸다.


미오의 생각 정도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 미쨩은 아름다운 것 앞에 서면 놀라울 만큼 단순해지니까. 역시 연예인이랑은 다르네, 라고 생각했겠지. 리츠는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삐뚜름하게 웃었다. 미오에게로 고개를 기울이자, 미오는 리츠의 눈치를 보고 있다. 아, 귀엽네.


“너보다 내가 더 예쁘다고 생각했지? 얼굴에 다 써 있어, 미쨩.”


여전히 제 손으로 미오의 손을 덮은 리츠가, 지우기 버튼 쪽에서 마우스를 슬쩍 멀어지게 만들었다.


“지우지 마. 내가 가질래. 응?”


리츠가 해사하게 웃었다. 반짝반짝하는 아이돌 웃음에 넋을 잠시 잃은 게 선명하게 보였다. 


‘그치만 미쨩은 곤란해 할 때 더 귀여우니까, 어쩔 수 없다니까.’


리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미오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미오는 제 귀와 볼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며 원망스러운 눈길로 리츠를 올려다보았다. 태연스럽게 말하고 싶은데 사쿠마 리츠 앞에만 서면 항상 바보스럽게 굴고 만다. 


‘그치만! 이렇게 사랑스러운 존재 앞에서 어떻게 저항하란 말이야.’ 


미오의 심리를 알고 일부러 이러는 게 분명했다. 리츠 씨는 정말 치사해. 그렇게 써 있는 얼굴이 사쿠마 리츠를 돌아본다. 해사하게 웃는, 아름다운 얼굴을 보자 또 정리되지 않은 진심이 마구 흘러나온다.


“시, 싫은 건 아니에요. 근데, 여기는 일터구, 업무용 컴퓨터고, 응. 제 얼굴 사진은 일하는 데에 필요한 게 아니니까? 그, 츠카사 군 사진도 베스트 컷만 남기고 이 컴퓨터에서는 지웠구, 세나 씨 사진도 리츠씨 사진도 지워야 해서.”


‘아,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나.’


조금 더 정리해서 말 할 수 있으면서, 늘 바보같은 모습만 보여주게 된다. 그런 사실에 새삼스러운 자괴감을 느낄 것도 이제는 없고.


“그, 그러니까. 사진은 드릴 수 있긴 한데…….”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면서 히메사키 미오는, 사쿠마 리츠의 눈치를 살짝 봤다. 리츠는 잡고 있던 손을 놓지 않은 채로 등받이에 더 깊이 몸을 실었다. 붉어진 귀 끝을 내려다보는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일터구, 업무용 컴퓨터구. 응, 다 맞는 말이네. 미쨩은 성실하니까.”


목소리에서 불만이 숨겨지질 않았다. 아니, 애초에 숨길 생각도 없었을지도. 리츠가 미오의 손목을 가볍게 감아쥐었다. 서늘한 손끝이 맥이 뛰는 자리에 닿았다. 무신경하게 보이려 노력하면서, 리츠는 화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있잖아, 미쨩. 혹시 스~쨩 사진 지울 때도 그렇게 오래 망설였어? 셋쨩 사진도?”


리츠는 남은 손으로 책상 위 미오의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그대로 잠금이 걸린 화면을 미오 쪽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업무용 컴퓨터에 남기는 게 문제면 여기로 옮기면 되잖아? 아니면 내 폰. 줄 수는 있다고 했지? 사진.”


리츠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해사한 아이돌 미소지만 누구라도 압박감을 느꼈을 테다. 좀 풀어주는 게 맞으려나. 점점 쭈그러드는 미오를 보며 리츠가 표정을 풀었다.


“그러고 보니까, 아까 말 하다 말았잖아. 무슨 말 하려고 했어, 미쨩?”

“……으, 너무해요, 리츠 씨!”


조금 몰아붙였다고 울상이다. 그렇지만 이 여자는 사쿠마 리츠가 히메사키 미오를 아무 이유 없이 괴롭힐 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으므로. 자신이 무얼 잘못한 건지 고민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리츠로서는 그 울상이 귀여워서, 변명하는 게 사랑스러워서 일부러 삐진 척 하는 일이 허다한데도. 


미오가 눈매를 늘어뜨리고 리츠를 올려다보았다.


“드릴 수 있긴 한데, 그…….”


민망한 듯 속삭이는 보드라운 목소리.


“저치고는 너무 예쁘게 나와서, 뭔가 거짓말하는 기분…인걸요.”


손목을 쥐고 있던 손이 힘 없이 풀렸다. 리츠는 미오와 눈높이가 비슷해지도록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다리를 느슨하게 꼬고,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로. 붉어진 볼과 늘어진 눈매를 한참 바라보다가, 대놓고 한숨을 푹 쉬었다.


“거짓말, 이라니. 그거 사진한테 실례야.”


사쿠마 리츠는 손을 뻗어 미오의 앞머리를 손끝으로 툭, 밀어올렸다. 갈색 눈에 당황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카메라는 있는 걸 그대로 찍는 도구인걸. 그냥 미쨩이 예쁜 건데.”


목소리는 나른하게 늘어져 있었다. 리츠는 미오의 귀 근처로 얼굴을 가져갔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오후 빛이 두 사람 사이에서 잘게 흔들렸다. 작은 목소리로 장난치듯 속삭였다.


“자기 얼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구. 미쨩은 바보네?”


몸을 다시 세우며, 아까 집어 들었던 미오의 휴대폰을 손바닥 위에서 한 번 더 돌렸다. 휴대폰을 미오의 무릎 위에 툭 내려놓고선 대단한 자비라도 베풀듯 말했다.


“자, 그럼 이렇게 할까. 미쨩이 직접 보내. 나한테. 나한테 보내고 나서 지우면 나도 아무 말 안 할게.”


또 그 말에 얼굴이 새빨개져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히메사키 미오. 진짜 미쨩은 바보. 리츠는 생각했다.


“네, 네에에……”


알림음이 울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리츠는 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을 켜고, 방금 도착한 사진을 확인하고, 그리고 그대로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한 번 넓혔다가 다시 좁히는 동작이 두어 번 반복됐다. 그 사이 사무실 안에서 들리는 건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와 복도 저 끝에서 누군가 캐비닛을 여닫는 소리뿐이었다.


“응. 잘 왔어. 미쨩.”


문득 시선이 업무용 컴퓨터 화면으로 향했다. 안 그럴 수가 없었다. 화면에 대문짝만하게 떠 있는 건 리츠의 얼굴이었으니까. 리츠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미쨩 바보. 지금 뭐 보고 있는 거야.”

리츠는 책상 모서리에서 몸을 일으켜 미오의 의자 등받이에 한 손을 얹었다. 나머지 손으로는 자기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화면에는 방금 받은 미오의 화보 사진이 그대로 떠 있었다. 리츠는 그걸 미오의 눈앞까지 가져다 댔다가, 다시 제 쪽으로 거두어 들여다봤다.

“나, 이거 안 지운다? 배경화면으로 할까 생각 중이거든. 아, 그건 좀 티 나려나. 마-군이나 셋쨩이 보면 시끄러워질 테고.”

리츠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남은 손으로 미오의 정수리를 툭툭 두드렸다. 손끝의 온도는 여전히 서늘했지만 힘은 조심스러웠다. 오후 세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고, 복도 쪽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안 돼요! 배경화면으로 했다간, 세나씨가 절 잡아먹으려 들 걸요?!”

세나 이즈미에게 혼나는 것을 생각만 해도 무서운지 미오는 소름이 돋은 제 팔을 쓰다듬었다. 아무리 P기관 사무실이라지만, 지금 리츠와 사랑 싸움하는 것도 세나에게 들키면 리츠와 미오 둘 다 혼날 테다. 리츠야 늘상 하는 잔소리로 넘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히메사키 미오는 그럴 수 없다! 연하의 아이돌에게 잔소리 듣는 일이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며, 또 세나 이즈미는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데!

“그러니까, 안 지울 테니까. 리츠 씨도 배경화면으로 하면 안 돼요. 알겠죠?”

제 귀에다 대고 속닥속닥. 뭐 그리 대단한 비밀 얘기라고 속삭이는 게 리츠는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미쨩은 셋쨩이 무서워?”

허리를 굽혀 미오와 눈높이를 맞췄다. 새빨간 눈이 가까이에서 천천히 깜빡였다. 세나 이즈미가 무섭다니. 뭐, 이해 못할 건 아니지만. 그럼 나는 안 무서운가? 리츠는 미오가 팔을 쓰다듬고 있는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얹었다가, 소름이 돋은 자리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어내렸다.


“걱정 마. 셋쨩, 나한테는 아무 말도 못 해. 잔소리는 하겠지만 그건 인사 같은 거구. 만약 셋쨩이 미쨩한테 뭐라고 하면… 음, 그땐 내가 막아줄게. 그럼 됐지?”

그러곤 몸을 세우며 주머니에서 다시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을 켜고, 뭔가를 몇 번 두드리더니 미오 쪽으로 슬쩍 돌려 보였다. 잠금화면은 나이츠 로고가 박힌 검은 바탕이었다. 리츠는 그걸 보여준 뒤 곧바로 화면을 껐다.

“봐. 배경화면으로 설정 안 했어. 대신 잠금 걸어둔 앨범에 넣어놨지롱. 나 말고는 아무도 못 봐.”

휴대폰을 주머니에 도로 밀어넣고, 미오의 의자를 발끝으로 툭 밀어 책상 쪽으로 붙여줬다. 그리곤 하품을 한 번 삼키며 손목시계도 없는 팔을 괜히 들여다봤다.

“이제 세 시네. 나 스튜디오 가봐야 하는데. 미쨩, 잠깐 나와 봐. 문 앞에서 배웅해 줘야지.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내 담당 프로듀서로서?”

“으, 배웅, 오늘은 참아주세요. 저 다섯 시까지 이거 다 정리해서 보내야 한단 말이에요…….”

미오는 우는 소리를 하다 뭔가 결심한 듯 의자를 빼고 리츠의 팔을 잡아끌었다. 가벼운 힘에 리츠는 기꺼이 끌려갔다. 얼굴이 가까워지고, 미오는 리츠의 입술에다 쪽 뽀뽀를 했다. 말랑한 감촉이 살짝 닿았다가 금세 떨어졌다.


“……하아? 너네 뭐하냐?”


누군가의 목소리만 들려오지 않았다면 정말 완벽한 엔딩이었을 텐데. 리츠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또 늦을 게 뻔한 사쿠마 리츠를 데리러 온 세나 이즈미가 사무실 문을 연 채 서 있었다.


“아~, 셋쨩. 노크 정도는 해. 바보.”


사쿠마 리츠가 히메사키 미오의 팔을 잡아당겨 제 등 뒤쪽으로 반 발짝 밀어 넣었다. 세나 이즈미는 몇 초쯤 아무 말도 못 하다가 종이를 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얼굴이 붉어졌는지 화가 난 건지 판단이 서지 않는 표정이었다.


“노크? 지금 노크가 문제야?! 어이, 쿠마 군. 지금 그게 문제냐고! 너 지금 몇 시인지 알아? 스튜디오 콜 세 시야, 세 시! 나는 또 네가 어디서 처자고 있는 줄 알고 이 층까지 뛰어 올라왔는데, 뭐? 프로듀서한테… 하아?! 쿠마 군 정신 안 차려?! 너 아이돌이야! 그리고, 히메사키 씨도, 이런 거, 누가 들어올지도 모르는 사무실에서!”


리츠는 세나의 잔소리를 전혀 듣지 않고 하품을 쩍 했다. 뒤로 손을 뻗어 미오의 손목을 가볍게 감아쥐었다가, 손끝을 한 번 눌러주고 가볍게 놓았다.

“미쨩. 무리하지 마. 나, 착하게 일하러 갈게.”


그러곤 세나 쪽으로 걸음을 옮겨, 여전히 문고리를 붙잡고 있는 남자의 어깨를 툭 밀며 복도로 나섰다. 등을 보인 채 손만 한 번 흔들었다. 문이 닫히기 직전, 세나의 잔소리가 복도 저편으로 멀어지는 소리에 섞여 낮은 목소리가 사무실 안으로 흘러들었다.

“이따 봐, 미쨩.”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