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키는 노른자를 풀다 말고 트레이의 옆모습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는 파이 필링으로 들어갈 사과 조림을 만드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유키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즐거워 보이네. 나는 안중에도 없는 거지.
유키 화이트가 일요일 오전부터 하츠라뷸의 주방에 방문한 이유는 단순히 트레이 클로버의 취미 생활을 돕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트레이와 함께 디저트를 만드는 일은 유키로서도 즐거운 일이긴 했으나, 정말 그것만을 위해서 일요일 오전부터 하츠라뷸의 주방을 방문하기에는 세상에는 즐거운 일들이 너무 많았다. 잠시 눈을 떼면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는 그림을 떼어내고 올 만큼의 위험 부담을 질 만한 일도 아니었다. 유키가 나른한 일요일 오전부터 트레이의 베이킹을 돕는 이유는 그것이 오로지 트레이 클로버의 취미였기 때문이었다. 옴보로 기숙사에도 주방은 있었고, 베이킹을 하고 싶었다면 옴보로 기숙사에서 그림과 함께 해도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농도가 맞춰졌는지 트레이가 화구의 불을 껐다. 유키는 문득 시계를 보았다. 벌써 파이 반죽이 휴지될 30분이 지나 있었다. 유키가 관성적으로 젓고 있던 노른자도 무척이나 곱게 풀어졌다.
“유키, 벌써 노른자를 풀고 있었던 거야? 너도 참.”
냉장 휴지해 둔 파이 생지를 가지러 가던 트레이가 유키가 무얼 하는지 보더니 작게 웃음 지었다. 사과파이가 그렇게 기다려졌던 거야? 그런 질문이 얼굴에 쓰여 있었다. 유키는 대답하지 않고 씩 웃었다. 사과 필링을 다 만들 때까지 기다리며 할 일이 없었다는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유키는 미리 사이다에 냉침해 둔 홍차를 트레이에게 내밀었다.
“고마워, 유키.”
트레이가 유키의 볼에 짧게 키스하고 홍차를 받아 들었다. 어? 유키가 눈을 크게 떴다. 트레이는 태연하게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선 뒤돌아 냉장고에서 파이 생지를 꺼냈다. 돌아본 유키의 귓불은 사과처럼 빨개져 있었다.
“실례합니다.”
굳이 인사말을 더했다. 오늘은 모스트로 라운지에 손님으로 온 것이라 딱히 긴장할 필요가 없음에도, 긴장이 되어서였다. 어, 화이트. 무슨 일이야? 모스트로 라운지의 홀 직원들이 안으로 더 들어오지도 못하고 서 있는 유키를 알은체 말을 걸었다. 유키는 눈을 도르륵 굴리다가 말했다.
“저, 제이드 선배를 만나러 왔는데요…….”
“아, 제이드 선배…… 아마 창고 쪽에 계실걸? 재고 파악 중이셔.”
옥타비넬 기숙사생이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고 적혀있는 문 쪽을 가리켰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적혀 있는데, 들어가도 되는 걸까? 유키는 잠시 고민하다가 문 쪽으로 향했다. 이전에 일했으니 관계자가 아예 아닌 건 아니니까! 라는 생각에서였다.
창고 안에는 미등이 켜져 있었다. 모스트로 라운지 내부는 분위기 조성을 위해 미등을 켜둘 필요가 있겠지만, 창고에까지 미등을 켜 둬야 하나? 유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창고 안을 둘러보았다. 제법 넓은 공간, 진열대에 비품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진열대의 모퉁이를 돌아오는 비취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유키가 찾던 사람이다.
“제이드 선배!”
유키가 문 가까이에서 기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재고품들의 확인을 위해서인지 제이드는 손에 긴 체크리스트를 들고 있었다. 제이드는 조금 놀란 듯 유키를 바라보다가 곧 빠른 걸음으로 유키에게 다가왔다.
“유키 씨는, 항상 제 예상을 벗어나는군요…….”
제이드가 허리를 굽혀 연인에게 속삭였다. 붉어진 채 멀어지려는 얼굴을 보고 제이드가 그 뒷덜미를 붙들었다. 허락을 구하는 질문도 없이 입술을 붙였다. 두툼한 혀가 밀려 들어와 작은 이를 쓸고 혀를 옭아맸다.
첫 키스였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네쥬 씨.”
“편하게 네쥬라고 불러도 되는데? 유키.”
네쥬가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며 유키가 시선을 살짝 피했다. 네쥬가 빙긋이 웃었다.
오늘 홀로 네쥬를 만난 것은 완전한 우연이었다. 그림은 듀스의 육상부 연습을 구경하겠다며 육상부로 놀러 가 버렸고, 다른 친구들은 모두 부 활동이나 저마다의 사정으로 바빠 유키와 함께 산기슭 거리로 쇼핑을 가줄 수 없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홀로 자유를 느끼며 산기슭 거리에서 돌아다니는 동안 오랜만에 혼자 나왔다는 네쥬를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NRC 학생으로서 RSA 학생은 아무래도 부담스러워서 거절하려 했지만,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유키가 네쥬의 반짝이는 눈빛을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네쥬와 함께 돌아다닌 오늘은 솔직히, 즐거웠다. 취향이 맞기도 했지만, 상냥하고 아름다운 소년과의 동행이 즐겁지 않을 리 없잖는가. 네쥬는 다정했다. 비-군의 후배라면 내 후배와도 같으니까! 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짐을 대신 들어줄 때는 솔직히, 심장이 떨어질 것 같았다. NRC 학생들도 짐을 들어주는 정도의 호의를 보이는 일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네쥬만큼 순수한 이유에서는 아니었다. 말하자면 ‘점수 따기’지. 유키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오늘의 네쥬는 달랐다. 연애 상대로서는 전혀 보지 않는 듯 부담 없이 대하면서도, 유키의 짐이 무거워 보인다며 ‘들어줘도 될까?’ 같은 질문을 해 왔다. 두근거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무튼, 고마웠어요. ……네쥬.”
“그럼, 나는 우리 학교로 돌아가 볼게. ……다음에 또 만나자, 유키.”
마지막 말은 거의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네쥬가 유키의 손을 붙잡고 가볍게 손등에 키스했다. 유키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쥬가 웃으며 유키의 손을 놓아줬다. 그럼, 안녕. 네쥬가 사심없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