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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Polar Express

POLAR EXPRESS

—믿음을 잃지 않는다면 마법은 항상 네 곁에 있다.






미안하다고 했다.


다 제 잘못이니 얼굴을 보여달라 애원하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겨울이 끝나면 셴하이트 부인이 될 여자는 옆으로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열차가 이번에 정차한 역 플랫폼에는 유독 가족의 배웅을 받는 이들이 많았다. 열차를 타기 전, 마지막으로 아들을 끌어안는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어디로 눈을 돌려도 눈물의 이별뿐이었다. 완전히 작별하는 것도 아니면서.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는 주제에. 유키 화이트는 휴대폰을 꺼냈다. 매지카메 리그램, 친구들의 안부 연락, 결혼 축하 연락 등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러나 그 속을 아무리 뒤져봐도 빌의 연락은 없었다.


미안하다고 했으면서. 나쁜 사람.


다시 시선을 창으로 옮겼다. 차창에 비친 얼굴은 무척이나 질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남을 조소하는 냉담한 얼굴은 새삼스러운 충격이었다. 어떤 불행도 다른 사람의 불행을 업신여기는 데에 쓰일 수 없기에. 특히 그 불행이 이별에 기인한 것이라면 더더욱. 잠시뿐인 이별이라 해도 누군가를 보내는 것은, 혹은 사랑하는 이를 내버리고 가는 것은 슬픈 일이므로. 희미한 기억 속 부모님의 얼굴을 더듬는 대신 유키는 휴대폰 액정을 문질렀다.


연인과 함께 살던 아파트는 휘석의 나라 북쪽 어느 도시에 있었다. 그가 자란 곳이라 했다. 남자는 유키의 친구인 잭도 그 근처에 살았다며 아주 먼 과거를 회상하는 얼굴로 덧붙였다. 우스운 소리지만 잭이 부러웠다. 나는 모르는 그의 유년을 함께 보냈다는 뜻 아닌가. 그런 부러움을 입에 담았을 때 빌은 어떤 얼굴로 웃었더라. 함께 살게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니 5년쯤 지난 일이다. 5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아주 오래된 일 같았다. 속상한 마음이 울컥, 신물처럼 올라왔다.


행복한 시절은 찰나고 사랑은 순간에만 머무는 것이다. 사랑했던 시절의 기억을 품에 안고 냉담해진 상대와 함께 살아가는 거라고,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은 모두가 그리 말한다. 미디어에 나오는, 오래도록 사랑이 식지 않는 단단한 반석 같은 관계는 없다고 주장했다. 유키 화이트는 그 주장을 믿지 않는다. 믿지 않음에도 그런 생각을 떨쳐낼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빌 셴하이트가 유키 화이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부정할 필요 없는 사실이다. 유키는 지금쯤 빌이 하고 있을 생각을 훤히 읽을 수 있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테다. 잠시 머리를 식혔다가 그에게로 돌아올 것이라 믿을 테다. 그가, 빌이 있는 곳이 유키가 돌아갈 곳이니까.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기 전부터 그랬다. 그럴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가끔은 유키가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가 이렇게 군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유키는 스스로를 함부로 대하고 싶어졌다. 자신에게 상처 내는 것으로 그에게도 같은 상처를 내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는 이유는, 역시 빌의 상처를 제 상처보다 더 아프게 여기는 마음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그를 사랑이라 부르는 모양이고.


……치사해.


빌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이렇게 된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것을 알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만, 머리를 식힌다는 핑계로 그에게서 잠시 떨어져 있는 수밖에. 핸드폰을 아예 꺼버리고 유키는 눈을 감았다.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아마 이 칸에 함께 타는 승객일 테다.


“네, 들어오세요.”

“실례합니다.”


들어온 사람은 중키의 밀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였다. 추측이 맞다면 유키와 비슷한 나이대로, 갓 대학을 졸업했거나 혹은 이제는 사회 초년생이라 부를 수 없는 스물 중반일 터였다.


“안녕하세요. 유우키 시노예요. 유우키가 성, 시노가 이름.”

“시노?”


일본식 이름인데. 유키는 당황에 눈을 깜박였다. 여러 번 겪어본 반응인지 시노가 가볍게 말을 받았다.


“네. 이 쪽에서는 흔하진 않은 이름이죠?”

“그, 아녜요. 고향…에서 쓰는 방식이라.”

“고향이라, 어쩌면 우리 같은 곳에서 왔을지도 모르겠네요.”

“아하하, 그러게요.”


유키의 웃음을 마지막으로 짧은 정적이 흘렀다. 유키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동방에서도 완전한 일본식 이름은 흔치 않은 걸로 아는데. 혹시……. 맞은편에 앉은 부드러운 인상의 여자는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키는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전까지는 빌에게만 가르쳐준 이름이지만…… 한 명쯤 더 알아도 문제될 일은 없을 테다.


“시라사키 유키노예요. 이쪽도 시라사키가 성, 유키노가 이름.”

“……혹시.”

“네. 트위스티드 원더랜드 출신은 아니에요.”


우리가 정말로 같은 세상에서 왔을지는 모를 일이지만요. 유키는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