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오늘은 이만하도록 하지.”
트레인 선생이 웬일로 수업을 일찍 마쳤다 싶었더니, 대부분의 학생들이 잠에 들어 있었다. 하긴, 점심을 먹고 난 후의 수요일 7교시의 마법 해석학 시간은 아무리 유키라고 해도 버티기 힘들었다. 유키는 제 옆자리에 앉아 침까지 흘리며 졸고 있는 제 파트너 마수의 코를 꾹 눌렀다.
“후냣! 아, 안 잤다구……!”
침까지 흘리며 자 놓고선 안 잤다고 묻지도 않는 질문에 반박한다. 그런 그림의 모습이 웃긴지 트레인 선생마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유키는 키득키득 웃으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림의 턱에 흐르던 침을 닦아주었다. 트레인 선생의 패밀리어 루치우스가 무언갈 말하려는 것처럼 야옹거렸다.
“그림. 일어나. 수업 끝났어.”
“후냐아…… 트레인의 수업은 정말 졸리다구우…….”
“네 집중력이 약한 거야.”
유키와 그림이 대화하는 소리에 학생들이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림의 옆자리에서 꾸벅꾸벅 졸던 듀스와 책에 얼굴을 박고 있던 에이스가 졸린 눈을 떴다. 유키는 그들을 흘겨보고선 손수건을 각 맞춰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림이 각 맞춰 접힌 손수건을 보며 삐죽거렸다.
“유키는 맨날 범생이 같은 소리만 한다구! 나는 바보가 아닌데!”
“그래, 그래. 오늘도 도망치면 가만 안 둘 테니까. 우리 그림, 바보가 아니면 이제는 시험공부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겠지?”
“내가 알아서 한다구~! 이번에는 유키보다 점수 높을지도 모른다구!”
그림이 앞발을 파닥거리며 항의했다. 유키는 어이 없는 얼굴을 했다. 트레인 선생도 그림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렸으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루치우스를 안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유키가 그림을 흘겨보며 샐쭉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림은 지난 마법 해석학 수행평가에서 낙제를 겨우 면할 성적을 받았지만 유키는 반 수석을 했다. 제발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톡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유키는 그림을 놀리듯 느물거렸다.
“그래? 그럼 나 공부 좀 도와줘. 우리 대장이 공부 가르쳐주면 또 수석 할 수 있을 것 같거든.”
“싫다구~! 유키 공부는 유키가 알아서 하라구!”
그림이 필기구도 챙기지 않고 도망치듯 반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그림 몫의 필기구를 챙기며 유키가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기숙사에 돌아가면 다시 만나야 하는데… 그림은 정말 바보야.”
듀스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에이스가 노트와 펜을 챙기며 실실거렸다.
“괜찮잖아? 어차피 방과 후에는 우리랑 같이 공부하기로 했고.”
유키로서는 완전히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림도, 에이스와 듀스도 말해주지 않은 탓이다. 유키가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쳤다.
“나만 빼고?!”
“남자들끼리의 우정이라는 게 있는 법이거든.”
“뭐야! 치사해!”
함께 수업 자료들을 챙겨 나가려던 유키가 짜증스럽게 발을 굴렀다. ‘남자들끼리의 우정’ 운운하던 듀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진짜로 나만 빼고 너희들끼리만 공부하려고? 너무한 거 아니야?”
유키가 짜증스럽게 듀스를 돌아보며 반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아얏.”
그리고, 누군가의 가슴에 얼굴을 부딪혔다.
유키와 부딪힌 사람은 키가 무척 커서 유키는 그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높이 쳐들어야 했다. 제가 부딪힌 사람이 누군지 확인한 유키는 저도 모르게 힉,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제이드 리치가 제 앞에 서 있었다.
제이드 리치. 2학년의 인어 쌍둥이 중 하나다. 검은색 브릿지를 오른쪽으로 늘어뜨린 걸 보니 제이드가 확실했다. 제이드가 상어처럼 뾰족뾰족한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순간적으로 겁을 집어먹은 유키가 어깨를 굳혔다.
기숙사 선배가 없어 윗 학년 선배들에 대해 잘 모르는 유키지만, 2학년의 곰치 인어 쌍둥이는 지난번 매지컬 시프트 사건 때 엮이지 말라고 조언해 준 바 있기에 대강은 알고 있었다. 플로이드는 기분파고, 제이드는 차분해 보이지만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예측되지 않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기분파가 낫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유키가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유키와 부딪힌 제이드는 이제 웃음을 거두고 무표정한 얼굴로 유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쩌면 사과와 애교 정도로 넘어가지 못할지도.’
유키가 마른침을 삼키며 사과하려 고개를 숙이려 할 때, 제이드가 너무 무서워하지 말라는 것처럼 미소 지었다.
“너무 놀라지 마세요, 분명 1학년의…… 화이트 씨. 맞지요?”
“아니, 아무리 봐도 놀란 게 아니라 무서워하는 거잖아. 제이드. 눈 있어?”
“무서워하다니요. 화이트 씨. 제가 무섭습니까?”
“아, 아뇨. 리치 선배.”
“그렇죠? 플로이드. 인간 여성의 마음은 섬세하다고 들었습니다. 역시 타인의 속마음은 직접 들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거죠.”
제이드가 그렇게 말하며 후후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제이드를 포함하여 그 교실에 있는 모든 사람이 유키가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두 사람에게서 유키를 구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헤에~ 그런가, 백도미쨩. 여기서 수업 들었어?”
“네? 네. 리치 선배. 1학년 마법 해석학 수업이—.”
“—그래? 그럼 내 볼펜 못 봤어? 5교시에 심화 마법의 역사 수업 여기였는데, 볼펜 잃어버려서.”
“‘리치’, 선배인가요.”
두 쌍둥이가 동시에 말했다. 유키는 일단 고개를 흔들었다. 플로이드의 볼펜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주인 잃은 볼펜 따위 본 적도 없다. 볼펜의 행방을 모른다는 답변을 듣자, 플로이드는 유키에게 금방 흥미를 잃고는 볼펜을 찾으러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유키 앞에 남은 제이드가 과장되게 슬퍼하는 얼굴을 꾸며내며 처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도, 플로이드도 ‘리치’는 맞으니 유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누가 봐도 유감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서늘한 낯에 유키는 잔뜩 긴장해서 제이드를 올려다보았다.
“에, 저, 그…… 리치 선배, 괜찮으시다면 이름으로 불러도 되나요?”
“그렇게 해주시면 기쁘겠습니다. 유키 씨.”
“네, 네에. 제이드 선배. 부딪혀서 죄송해요, 마음이 급해서 앞을 제대로 못 봤어요.”
유키가 고개 숙여 사과했다. 아무리 그래도 단순히 부딪혔다는 이유만으로 여자아이를 때리거나 부당한 일을 요구하지는 않겠지만, 키 큰 남자는 어쩔 수 없이 두려운 탓이었다. 제이드는 흥미로운 눈으로 유키를 내려다보더니, 배시시 웃으며 질문했다.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네?”
“이런저런 방면에 있어서… 말입니다. 그 조그만 마수를 잡는 걸 포함해서, 말이죠.”
“아, 그. 괜찮아요. 그림도 힘들면 공부를 도와달라며 오겠죠!”
절대 맨입으로 도와주는 것은 아니겠네. 유키는 직감했다. 제이드의 능력이라면 아주 적은 노력으로도 그림을 잡아서 유키의 품에 안겨줄 수 있으면서 제가 들인 노력 이상의 대가를 요구할 테다. 유키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화를 잘라내자, 제이드가 아쉬운 듯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렸다.
“아아. 그렇군요. 아쉬운 일입니다. ……유키 씨를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을 알아서요. 말씀드린 대로, 여러 가지 방면에서 말이죠.”
“아…… 제이드 선배가 도와주시겠다는 뜻이 아니었군요.”
“재밌는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확실히 유키 씨의 고양이를 잡는 것은 별 힘든 일 축에도 속하지 않지만요.”
제이드는 유키와 눈을 마주친 채 뾰족뾰족한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먹이를 앞에 둔 포식자 같은 분위기였다. 제이드는 무척 즐거워 보였지만, 포식자를 앞에 둔 피식자의 입장으로 그리 즐거워할 수만은 없었다.
“저, 그림을 잡으러 가야 해서…… 이만 가 봐도 될까요?”
“직접 잡으러 가시는 건가요? 성실하시네요.”
제이드가 더 짙게 웃었다. 누가 봐도 조롱하는 듯한 말씨였다. 유키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제이드 선배한테 드릴 만한 게 없어서요. 아쉽게도.”
“왜 없습니까?”
“뭐, 뭘 받아 가시려고요?”
순간적으로 놀란 탓에 유키는 말까지 더듬어가며 질문했다. 낡은 기숙사의 감독생은 이세계에서 무일푼으로 트위스티드 원더랜드로 떨어진 탓에 가진 게 없었다. 어찌저찌 생활비는 외부 장학금으로 해결한다 해도 넉넉하게 생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감독생에게 제이드 리치가 탐낼 만한 것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제이드는 태연하게 말했다.
“뭐, 유키 씨에게는 낡은 기숙사도 있고…… 그 영민한 머리도 있죠. 게다가 인기도 있으신 편이고.”
“그, 기숙사라든가, 그런 건 그림을 잡아주시는 데에 대한 대가로는 너무 크지 않을까요?”
유키가 제이드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눈치를 보면서도 할 말 다 하는 모습이 제이드에게는 우스울 뿐이었다. 그러나 제이드는 진지하게 생각하다 말했다.
“제가 받아갈 만한 작은 것 중에서는, 흠. 소원권은 어떠신가요?”
유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대체 뭘 요구하시려고요?’
얼굴에 써 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뱉지 못하는 모습에 제이드가 즐거운 표정으로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상식 밖의 일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유키 씨가 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 해도 큰 일은 아닐 테고요.”
“저, 거절해도 되나요? 그림은 알아서 하겠죠. 그림이 대마법사가 못 되어도 저랑은 상관없거든요. 그림은 슬퍼하겠지만.”
“저런, 매정하기도 하셔라.”
“그러는 제이드 선배는 소원권으로 저에게 무슨 부탁을 하시려고요?”
‘그런 작은 일에 소원권을 걸 리가 없잖아요. 제가 바보인 줄 아세요?’
유키 화이트에게 제이드에게 대들 수 있는 충분한 힘이나 영향력이 있었더라면 아마도 그런 말을 했을 테다. 속내가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여자아이를 앞에 두고, 제이드가 생글생글 웃었다.
‘아쉬워라. 이렇게 재미있는 사람도 드문데.’
“글쎄요. 지금의 저로서는 모르는 일이지요.”
“제이드 선배도 뭘 요구하실지 모르시는 걸 제가 받아들이기에는 좀…….”
“유키 씨는 무척 조심스러우신 분이군요.”
제이드가 그리 말하며 알겠다는 듯 홀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교실을 뒤지던 플로이드가 볼펜을 찾았다며 제이드 곁으로 다가왔다. 유키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빠른 속도로 말을 뱉었다.
“뭐, 소중한 게 있는 사람일수록 조심스럽게 굴기 마련이죠. 그럼 저는 가 봐도 될까요?”
“가기 전에, 유키 씨의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해도 되나요?”
“질문이야 자유 아닐까요? 제가 대답할 지도 자유인 것처럼요!”
“아하하! 유키 씨는 정말 재미있는 분이네요! 그렇죠, 플로이드?”
“그래? 백도미 쨩 무슨 재미있는 말 했어?”
“그다지 재미있는 말은 안 했다고 생각하는데요…….”
유키가 즐거이 웃는 제이드의 눈치를 보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제가 무슨 말을 했다고 웃는지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속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표정에 비해 하는 말은 당돌하기 짝이 없었다.
‘이 태도가 재밌는 거 같은데.’
플로이드는 제이드의 마음을 이해했다. 쌍둥이가 아니라도 당연히 알 수 있다. 플로이드에게도 이런 사람은 재미있게 느껴지니까. 그렇지만 지금은 약한 상대를 툭툭 건드리며 놀릴 때가 아니었다.
“제이드, ‘모스트로 라운지’ 오픈 시간 거의 다 된 건 알지?”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습니까? 아쉽네요. 더 대화하고 싶었습니다.”
“나중에 해. 그럼 백도미 쨩, 나중에 우리 라운지에 놀러와~. 아, 물론 돈 있을 때.”
“네에. 그럼 가볼게요!”
고개 숙여 인사한 유키가 복도를 달려나갔다. 그 뒷모습을 본 제이드가 기분 좋게 웃으며 플로이드와 나란히 걸었다.
“제이드, 징그러워. 웃지 마.”
“아, 죄송합니다. 플로이드. 재미있는 일이 곧 생길 것 같기에.”
“흐응, 그건 백도미 쨩과 관련한 일?”
“예. 그렇죠. 플로이드. 돌아가면 아즐에게 질문할 게 생겼네요.”
“그렇구나~ 뭐, 나랑은 상관없지만.”
‘백도미 쨩이 재밌긴 해도, 그렇게까지 재밌어할 일인가? 아즐의 ‘사업’이 시작되기 직전에 저럴 건 아닌 것 같은데.‘
곧 기말고사가 다가오고, 기말고사란 아즐의 ’사업‘이 결실을 거두는 때다. 그리고 제이드와 플로이드는 재밌어 보인다는 이유에서 아즐의 사업을 돕고 있었다. 아즐의 사업이 성공하면 오만 잡어들이 모여들 확실한 재미가 보장될 텐데, 왜 작은 백도미 한 마리를 괴롭히려는 걸까? 상식적으로 제 쌍둥이를 이해할 수 없어진 플로이드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 *
그 일이 있고 며칠이 지났다. 제이드도, 플로이드도 굳이 유키를 찾아오지 않았기에 유키는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점심 식사 시간, 식탁에 앉은 그림이 당당하게 말했다.
“오늘부터 에이스랑 듀스랑 같이 기말 대비 스터디를 하기로 했다구!”
“뭐어? 나 빼고 정말 너희들끼리만 공부해서 되겠어? 에이스는 그렇다 쳐도, 듀스와 그림은 영 못마땅한데.”
그리 말하는 유키는 정말 순수하게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유키가 굳이 제 친구들을 조롱하려는 의도나 낮잡아 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듀스가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유키가 보기에 나는 역시 우등생과는 거리가 있는 거구나…….”
“맞아! 부하. 부하는 나랑 듀스를 너무 무시한다구!”
“그렇지만 말야, 그림은 너무 놀기 좋아하고, 듀스는 옆에서 끈기있게 설명해주는 선생님이 없으면 곤란한걸.”
유키가 삐죽거렸다. ‘그러니까 너희들 옆에는 내가 있어야 해!’라는 나름의 어필이었지만 어쩐지 역효과만 난 것 같았다. 듀스는 기운이 쭉 빠져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었고, 그림은 입을 삐죽 내밀고 유키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멘치카츠도 안 먹고 유키를 흘겨보는 것을 보니 ‘그림은 못마땅하다’라는 말에 여간 삐진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니까 둘 다, 나를 데려가면 되잖아! 점심 먹고도 나만 따돌릴 거야?”
“유키. 공부는 각자도생이야.”
“에이스까지 그러기야?!”
에이스가 도와줄 거라는 생각은 단 하나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보니 어느 정도는 기대가 쌓였던 모양이다. 유키가 배신감에 크게 외쳤다. 목소리가 크고 날카로워 주위 학생들이 놀란 얼굴로 유키를 쳐다보았다. 제게로 꽂히는 시선에 유키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더니 곧 “됐어!” 하고 소리쳤다. 맞은 편에 앉은 하츠라뷸의 바보 둘과 제 곁의 그림을 노려보더니, 유키는 먹던 샌드위치와 샐러드가 놓인 그릇을 집어 들고선 자리에서 일어서 버렸다.
“부하야! 먹을 걸 남기면 안 된다구!”
“그럼 그림이 먹든가!”
집어 들었던 그릇을 거칠게 내려놓고 유키는 그대로 대식당에서 나가 버렸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목 뒤편까지 시뻘개진 채였다. 유키의 반짝거리는 에나멜 메리제인 구두가 바닥을 밟는 딱딱 소리가 제법 컸다. 그림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멀어져가는 유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척 당황한 표정이었다. 에이스가 중얼거렸다.
“아~. 큰일났네.”
“부하야…… 유키 왜 저러는 거냐구.”
“화난 걸까?”
“안 화났겠어? 니들이 자꾸 혼자 공부한다는 게 따돌리는 것처럼 느껴졌나 보지. 아, 귀찮아……. 어쩔 거냐?”
“마지막 쐐기는 에이스 네가 박았다구!”
“그래서 어쩔 거야? 듀스는 그렇다 쳐도, 그림. 유키는 네 감독생이잖아? 그래야 할 이유라도 있었어?”
그림이 남 탓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숙였다. 좋아하는 음식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입속에 뭔가 집어넣지도 않고 한참 생각하다가, 그림이 고개를 들었다.
“우우…… 어떻게든 될 거라구! 성적 잘 받으면 유키도 이해해 줄 거라구!”
*
대식당에서 뛰쳐나간 유키가 도착한 곳은 도서관이었다. 점심을 먹은 그림과 친구들이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반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유키가 없는 곳에서 공부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으니 도서관에는 오지 않을 것이다. 선 채로 괜히 바닥을 발로 두드리던 유키는 사서 선생님에게 눈총을 받고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진짜 셋 다 왜 그러는 거야?’
사서 선생님에게 종이와 펜을 빌린 유키는 문제집을 빌려와 남은 자리에 앉았다. 공부를 해 보려 했지만, 세 바보들에 대한 서운함 때문인지 교과서 내용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평소에도 와닿지 않는 마법 해석학은 물론이고, 국어 지문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차라리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는데 학교에 마음껏 소리 지를 수 있는 곳이 있을 리 없다. 유키는 종이에 마법 해석학의 수식을 몇 자 끄적이다가 자리에 그대로 엎드렸다. 도서관 안의 사람들은 모두 제 할 일들을 하느라 그 누구도 유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사실에 유키는 기묘한 안정감을 느끼며 눈동자를 굴렸다.
눈에 들어온 풍경은 하품이 나올 정도로 평범한 학교 도서관의 모습이었다. 기출 문제를 모아둔 문제집을 푸는 학생들도 있었고, 분철된 자습서를 읽는 학생들도 있었다. 책상 위로 길게 엎드린 채 도서관 안을 관찰하던 유키는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저 자습서를 보는 사람이 유독 많지 않나?’
누군가가 직접 만든 것처럼 보이는 자습서를 보는 사람이 유독 많았다. 유명한 문제집이라면 그럴 수 있겠지만, 그런 유명한 참고서라면 중간고사 때에도 보는 사람이 많았을 테다.
그러나 회청색 표지의 스프링 제본된 자습서라니. 중간고사 때 도서관 지박령처럼 도서관에 처박혀 도서관에 있는 여러 자습서와 참고서 등을 읽고 문제를 풀었는데도 불구, 저렇게 생긴 참고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새로 나온 참고서인가?’
회색 색지를 표지로 삼아 스프링 제본된 참고서는 멀리서 봐서는 이름도, 무엇도 알 수 없었다. 유키는 의아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옆 자리에 앉은 같은 반 친구의 손 옆을 툭툭 쳤다. 같은 반 친구 요하네스가 의아한 얼굴로 유키 쪽을 돌아보자, 유키가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요한. 저거, 뭔지 알아?”
“저거?”
유키의 손끝이 가리킨 곳은 옥타비넬 학생이 스프링 제본된 참고서를 읽고 있었다. ‘저 참고서가 어쨌다는 거야.’ 하는 표정으로 유키를 돌아보던 요한은 곧 이상한 점을 알아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이 유키의 귓가에 속삭였다.
“안 그래도 저 문제집을 가지고 있는 녀석한테 물어봤는데, 전혀 안 알려주더라고.”
“새로 나온 문제집인 걸까? 중간고사 때는 전혀 못 봤는데.”
“그렇지 않을까? 아마 같은 인쇄소에서 제본하거나 했겠지.”
유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색의 색지로만 표지 제본을 해주는 것도 말은 안 되지만, 그래도 ‘학기 중간에 새로 나온 환상의 참고서’라는 가설보다는 훨씬 일리 있었다. 유키가 중얼거렸다.
“산기슭 거리에 가면 팔려나?”
“그러지 않을까? 오늘 수업 마치면 산기슭 거리 서점에 같이 갈래? 서점 주인은 아는 게 있을지도 몰라.”
“에에, 데이트 신청?”
“뭐, 그렇게도 볼 수 있고.”
요한이 조금 붉어진 얼굴로 헛기침했다. 유키가 곤란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데이트 신청이냐는 질문은 농담이었는데, 이렇게 진담으로 받아치면 좀 곤란한데……. 유키의 표정에서 곤란함을 캐치한 요한이 한 발짝 물러섰다.
“근데 웬일로 혼자 있어? 그림이랑 하츠라뷸의 바보 녀석들은 어디 두고?”
“그게…….”
곤란한 얼굴로 눈을 굴리던 유키의 눈이 금세 세모꼴이 되었다. 그 세 멍청이들이 유키를 어떻게 대했는지 생각하자면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바보 트리오가 유키를 어떻게 따돌렸는지 친구에게 모두 일러바치려던 차,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백도미 쨩, 친구랑 속닥속닥, 무슨 재밌는 얘기 해?”
애교 어린 말투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긴장이 올라온다. 유키는 요한과 당장에 떨어져 뒤를 돌아보았다. 플로이드 리치가 생글생글 웃으며 서 있었다. 유키는 반사적으로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플로이드 리치는 무척이나 기분파로, 제 기분이 안 좋아지면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는 사람이었다.
‘도서관 안이니까 기분이 안 좋아져도 크게 난동은 못 부리겠지만…….’
유키와 요한이 굳은 채로 대답하지 못하자 플로이드가 인상을 작게 찌푸렸다. 유키가 더 늦기 전에 굳은 혀를 억지로 움직여 대답했다.
“새로 나온 참고서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헤에, 참고서가 새로 나왔다고? 제이드한테 들었어?”
“아뇨, 다들 같은 참고서로 공부하고 있길래…….”
“오후에 산기슭 거리 서점으로 같이 가보기로 했습니다. 저희 둘이서요.”
어쩐지 ‘단둘이서’를 강조하는 듯했다. 같은 반 친구와 연애적 관계로 오해받고 싶지 않았던 유키가 요한을 흘겨 보았지만 요한은 어색하게 웃어 보일 뿐 다른 해명을 하지 않았다.
“헤에~ 그렇구나. 혹시 이거?”
플로이드가 제 손에 들린 문제집을 들어 보였다. 다른 학생들이 열심히 보고 있던 참고서와 같은 것이었다. 달리 거짓말을 할 것도 없기에 유키가 고개를 끄덕이자, 플로이드가 두 사람을 픽 비웃었다. 기분이 상한 유키가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로 질문했다.
“왜요?”
“에에, 백도미 쨩 화났어?”
“……아뇨.”
그러나 플로이드의 이죽거리는 목소리에 유키는 금세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유키라고 화를 참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플로이드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키는 다들 나한테 왜 이러냐며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이를 악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아, 백도미 쨩 화 참는 거 웃겨~. 구운 새우처럼 얼굴이 빨개져선 입술 삐죽대고. 웃긴 거 보여줬으니까 나도 뭐 하나 알려줄까?”
“……뭔데요?”
플로이드가 순식간에 유키의 얼굴 앞에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달콤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귀가 간지러워 유키가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이거, 산기슭 거리 서점에서는 못 구해.”
“에?”
“그러니까 백도미 쨩의 잡어 친구랑 나가도 소득은 없겠네! 어떻게 생각해, 잡어야?”
“어떻게 생각하냐고 질문하셔도…….”
플로이드가 유키에게만 속삭인 것을 요한이 알 방법은 없다. 요한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플로이드를 올려다보았다. 플로이드는 요한을 완전히 무시한 채, 방글방글 웃으면서 유키의 표정을 살폈다. 곤란하고 난처한 얼굴이 무척 보기 좋았다.
“아, 그러고 보니 이거라면 바다표범 쨩도 가지고 있는데, 바다표범 쨩이 말 안 해줬어? 설마 내가 백도미 쨩 구애 활동 방해한 거?”
“네?”
“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 백도미 쨩, 바다표범 쨩의 계약에 관해서는 모르지? 그게 약관이니까.”
“약관……이요?”
유키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플로이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키가 알기로, 약관이라고 하는 단어는 계약이 오갈 때나 쓰는 말이다. 일개 학생의 입에서 가볍게 오갈 단어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림 녀석, 또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바보 고양이 같으니!’
유키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플로이드를 올려다보자, 플로이드가 킥킥 웃었다. 그 웃음은 유키의 무지를 조롱하는 의미 같기도 했고, 좋아하는 여자아이를 괴롭히는 못된 소년의 것 같기도 했다. 플로이드가 비웃음을 거두고 해사하게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있지, 백도미 쨩. 이게 궁금하지? 방과 후에 ‘모스트로 라운지’로 오면 알려줄게♡ 아, 모스트로 라운지라면 옥타비넬에 있어.”
“아니, 저는-.”
“-못 오겠어? 우리가 무서워서?”
“네?”
“무서운 거지? 항상 제이드만 보면 도망치려고 생각하고. 제이드는 ‘미남이란 희귀한 종족이니 두려워하는 것도 어쩔 수 없지요.’라느니 했지만, 백도미 쨩 그날 딱히 우리 잘생겨서 쳐다본 것도 아니잖아.”
플로이드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매지컬 시프트 대회 전에 쌍둥이를 지켜봤을 때, 그 둘과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잘생겨서 좀 봤어요! 안 되나요?’ 따위의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후회해봐야 시간을 돌릴 수는 없었다.
두려움에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애써 진정시키며, 유키가 과장된 몸짓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듣는 말인데요. 리치 선배들이 잘생긴 건 사실이고…… 저, 얼굴 뜯어먹다가 죽을 예정이라서요.”
“헤에, 그래? 내가 안 무섭다, 이거지?”
애교어린 평소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빠졌다. 사람을 괴롭히다 못해 잡아먹으려고 드는 포식자의 얼굴이었다. 무표정한 플로이드의 얼굴을 본 유키의 얼굴에서도 혈색이 함께 빠져나갔다. 유키는 제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플로이드 선배 같은 사람이 안 무서울 리가 없잖아. 다 알면서…….’
유키 화이트는 사실 겁이 많다. 사람을 온전히 믿기도 힘들어한다. 그래서, 궁지에 몰렸을 때 유키 화이트는 가끔.
“네. 전혀 안 무서우니까, 기다리고 계세요.”
“에?”
“방과 후, 모스트로 라운지라고 했죠? 혼자 가면 되나요?”
“아하하! 백도미 쨩, 정말 재밌는 인간이네!”
이곳이 도서관이라는 것도 잊었는지, 플로이드 리치는 배까지 쥐고 큰 소리로 깔깔 웃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커지자 근처에서 공부하던 리들이 달려왔다.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을 하고 리들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플로이드. 도서관에서 시끄럽게 굴면 안 된다는 기본적인 매너조차 모르는 줄은 몰랐는데.”
“하핫, 금붕어 쨩, 백도미 쨩 봤어? 진짜 웃겨!”
리들이 차가운 눈빛으로 유키를 쳐다보았다. 무척이나 엄격하고 진지한 표정. 유키로서는 리들이 제게 도움을 줄 것 같진 않았지만, 플로이드에게 한 마디 정도 해줬으면 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남자랑 그렇게 엮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유키.”
조언하는 마지막 말은 거의 한숨에 가까웠다. 의외로 제 걱정을 해주는 말에 유키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거라면 그렇게 했겠지만요…….’
플로이드는 사서 선생님이 달려오기 직전에 웃음을 멈췄다. 무척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로 생글생글 웃으며 유키의 머리에 제 손을 턱 얹었다.
“그럼 나 기다린다? 꼭 와야 해, 백도미 쨩!”
유키가 이를 악물었다. 유키의 표정과 즐겁게 도서관에서 달려나가는 플로이드를 보며 리들이 질문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니?”
“아뇨.”
유키는 단칼에 잘라냈다. 하츠라뷸의 두 바보를 챙기는 것만으로도 벅찰 텐데, 리들에게 자신까지 신경 쓰게 할 수는 없었다.
“제가 해결할게요.”
*
홈룸 시간이 되기 전까지 유키는 그림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름의 시위였다. 그림은 계속 안절부절 못하다 결국 홈룸이 끝나고 나서야 애처로운 표정으로 다가와 유키에게 질문했다.
“부하야…… 삐졌어?”
“안 삐졌어.”
“그럼 부하. 나 오늘도 혼자 공부해도 돼?”
“그러든가.”
유키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유키의 허락을 받아낸 그림이 눈치 없이 활짝 웃으며 방방 뛰었다. 삐진 게 아니라 화난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기운도 없었다. 플로이드와 대화한 이후로 심적 피로감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환하게 웃는 그림이 대단할 지경이었다.
‘어떻게 나 몰래 계약 같은 걸 해놓고도 이렇게 해맑게 굴 수 있는 건데?’
유키에게 계약을 했다는 사실을 들키는 것도, 계약 사항을 수행하지 못 했을 때 어떻게 될지도 전혀 두렵지 않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단순한 그림의 평소 성격을 생각해보면 답이 빤히 나왔다. 그런 것 따위는 생각하지 않을 게 뻔했다. 그림의 단순한 면모를 귀엽다고 생각하고 사랑하지만 위험한 짓은 말하고 하는 게 맞지 않나. 그림의 행동이 못내 서운하고 짜증스러웠다.
그런 유키의 마음을 조금도 모른 채, 그림은 즐거운 얼굴로 홈룸이 끝난 교실을 빠져나갔다. 유키는 한숨 쉬며 홀로 교실을 빠져나가 메인 스트리트를 걸었다. 그림은 아마도 도서관으로 공부하러 갔을 테다. 평소였더라면 유키도 도서관에 공부하러 갔을 테지만 오늘은 달랐다. 유키는 메인 스트리트를 걸어 거울 사로 향했다. 유키의 대답에 즐겁게 웃던 플로이드를 생각하면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하는 짓이고 정신연령이고 초등학생 수준인 애를 꼬셔서 뭘 시킨 거야!’
플로이드를 만나면 아주 혼쭐을 내 줄 테다. 힘도 없고 마법도 못 쓰는 유키가 플로이드를 혼내줄 방법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지만,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화가 난 유키는 괜히 바닥을 세게 밟았다.
“이런, 바닥 무너지겠습니다.”
누군가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유키가 짜증을 숨기지 못하고 홱 고개를 돌렸다. 제법 키가 큰 은회색 머리칼의 옥타비넬 학생이 서 있었다. 안경을 써서 지적으로 보이는 얼굴이 도저히 그런 농담을 할 것 같지 않은 인상이었다. 유키가 끓어오르는 화를 억지로 삼키고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좀 세게 밟는다고 안 무너져요.”
“기분을 상하게 한 모양이군요. 농담입니다.”
“여자애한테 몸무게는 중요하니까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아주세요.”
“그 기분 잘 알죠. 다음부터는 주의하겠습니다.”
제법 날카롭게 말했는데도 그는 기분도 상하지 않는지 빙글빙글 웃고만 있었다. 차라리 화를 내면 속내를 알기 편하겠는데, 웃기만 하는 얼굴로는 속내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무안하지도 않나, 저 사람은?’
괜히 예민하게 반응했다는 것이 부끄러워진 유키는 민망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여전히 웃는 얼굴로 옥타비넬 학생이 부드럽게 질문했다.
“그래서, 다른 학년까지 소문이 자자한 고물 기숙사의 감독생이 거울 사에 무슨 일입니까?”
“어머, 저도 다른 기숙사에 친구가 있어요.”
“다른 기숙사에 놀러 가시는 거라면 그 친구와 함께 오셨겠죠.”
정곡을 찌르는 대답이었다. 유키의 친구가 있는 기숙사인 하츠라뷸이나 폼피오레는 기숙사 내규가 강한 편이었다. 다른 기숙사의 친구를 초대하려면 사전에 약식으로라도 허락을 받아야 했다. 어디로 가는지 밝히고 싶지 않았는데, 모르는 사람에게 다 알려주게 생긴 유키는 불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친구랑 공부하러 가는 게 아니라, 선배한테 초대를 받았어요.”
“선배분들과도 친분이 있다니, 제가 화이트 씨를 과소평가했군요.”
“그럼요. 옥타비넬의 리치 선배에게 초대를 받았답니다. 모스트로 라운지로 오라던데요.”
옥타비넬 학생이 픽 웃었다. 어쩐지 비웃음이 섞여 있는 듯, 보는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옥타비넬 사람은 다 이런가. 유키가 눈을 세모꼴로 뜨고 옥타비넬 학생을 노려보았다. 그는 유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부드럽게 접어 웃었다.
“모스트로 라운지라. 좋은 공간이죠. 공부하기에도, 고백하기에도 좋고.”
“플로이드 선배가 저한테 고백하실 거 같진 않은데요.”
“아, 플로이드에게 초대를 받았습니까?”
“초대라면 초대죠. 기다리고 계신다고 했으니까요.”
유키는 그런 말만을 남기고 옥타비넬 기숙사로 향하는 거울로 들어갔다. 그 옥타비넬 학생도 마침 기숙사로 가는 길이었는지 유키를 뒤따라 옥타비넬로 향했다. 처음 와 보는 옥타비넬 기숙사는 바다 아래에 있는 듯, 예상했던 하늘과 땅이 있는 풍경이 아닌 바다 아래의 풍경이 펼쳐졌다. 통유리 바깥으로 펼쳐진 빛이 비치는 푸른 바다에서 색색깔의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유키는 이곳이 나름 적진의 한가운데라는 것도 잊고 감탄했다.
“와아…….”
“옥타비넬에는 처음 와 보십니까?”
돌아보면 아까 전 그 옥타비넬 학생이 서 있었다. 유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모스트로 라운지에는, 방문해 보신 적 있나요?”
“아뇨. 이제 가 봐야죠.”
“저도 모스트로 라운지로 향하는 길인데, 레이디를 에스코트할 영광을 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에스코트니 뭐니 멋지게 말했지만, 그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다만 살짝 웃으며 길을 안내하듯 앞서 걸어갈 뿐이었다.
‘뭐야, 이 사람?’
유키는 앞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황급히 그를 따라갔다. 그는 걷는 속도를 배려해 주지 않았기에, 그와 발맞추기 위해 유키는 뛰듯이 걸어야 했다.
“플로이드가 화이트 씨를 초대하다니, 의외군요.”
“그런가요? 저는 별로…….”
“플로이드는 좋은 사람이지만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친구라서 말입니다.”
유키는 그 말을 들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 사람,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말하는 것만 들어보면 꼭 플로이드 리치가 유키 화이트를 좋아한다는 것처럼 말하지 않는가! 게다가 내용도 꼭, 플로이드는 변덕이 심하니 너 같은 건 언제나 차 버릴 수 있다고 주의를 주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연애로 가득 찬 사람인가. 유키는 괜히 삐딱한 생각을 하며 말했다.
“이 학교에서 플로이드 선배의 부름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아하, 별로 당신의 의지로 초대를 수락한 건 아니라는 뜻이군요.”
“네, 뭐. 그렇게 보셔도 좋고요.”
불퉁한 대답에 남자가 다시 웃었다. 유키는 남자를 흘겨보았다. 입술 아래에 점이 있구나. 남자를 보다 괜한 사실을 깨달은 유키는 인상을 찡그렸다. 남자는 질리지도 않는지 캐물었다.
“플로이드가 왜 당신을 불렀는지에 관해서는 압니까?”
“다들 새로운 참고서를 가지고 있던데, 플로이드 선배가 그에 대해 아시는 눈치더라고요. 그림도 엮여있는 것 같기에 조사하러 왔어요.”
“아. 새로운 고객을 유치한 거군요. 플로이드에게는 선물을 줘야겠습니다.”
“‘고객’이요?”
마법으로 남자는 순식간에 교복에서 기숙사복으로 갈아입었다. 처음 보는 옥타비넬의 기숙사 복은 깔끔한 동시에 화려한 디자인이었다. 만면에 사람을 홀릴 것 같은 웃음을 지은 남자가 말했다.
“족보에 관한 것이라면 제가 책임자이니, 지배인 실로 모시죠.”
어느새 둘은 모스트로 라운지의 입구 앞에 서 있었다. 남자가 문을 열자 밝은 빛이 남자의 뒤에서 쏟아졌다. 그는 유키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개가 늦었네요. 제 이름은 아즐 아셴그로토. 모스트로 라운지의 지배인이자, 옥타비넬 기숙사의 기숙사장입니다.”
아즐이 눈을 접어 웃었다. 유키가 쏟아지는 빛에 눈살을 살짝 찡그렸다.
“……그림도 아셴그로토 선배와 계약을 한 건가요?”
“다른 사람의 계약 사항은 비밀입니다. 물론,”
한 템포 쉰 아즐이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계약’을 하면 달라질 수도 있고요.”
‘덫이었구나.’
유키는 순간 깨달았다.
그러나 이제는 도망칠 수 없었다.
*
“질문에나 제대로 답해주세요. 그림도 아즐 선배와 계약을 한 건가요?”
“다른 사람의 계약 사항은 비밀이라니까요. 플로이드가 알려주지 않던가요?”
“저는 그 애의 감독생이에요. 유사시 그 애가 한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입장에서 질문하는 거라고요.”
언뜻 보면 유키의 말에는 틀린 부분이 없어 보였다. 감독생은 낡은 기숙사에 대해 다른 기숙사의 기숙사장과 같은 권한을 지닌다. 그러나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의 기숙사장은 그 기숙사의 책임자이자 대표일 뿐, 기숙사 각 학생의 책임을 나눠 질 필요는 없었다. 다른 기숙사의 기숙사장들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유키의 말을 들은 아즐이 픽 비웃었다.
“그렇다면 그림 군의 계약을 필요시 유키 씨가 대신한다, 그런 제안이십니까?”
“저희는 둘이서 하나예요. 이런 상황에서 그림을 제대로 ‘계약의 주체’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요?”
“꼭 그림 군의 부모라거나, 진짜 보호자라도 되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여전한 비웃음을 얼굴에 띄운 채 아즐이 말했다. 유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유키와 그림은 혈연 관계도, 그림이 유키와 ‘둘이서 한 학생’이라는 증서도 없다. ‘둘이서 하나’라는 규칙은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 안에서만 통용될 뿐, 실제 서류는 유키와 그림 둘의 몫이 제대로 별개의 학생으로서 준비되어 있었다. 교사진들 정도만 알고 있어야 할 사실이지만, 어째서인지 아즐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즐이 선심을 베풀듯이 말했다.
“그런 억지로는 계약을 파기할 수 없습니다. 이미 그림 군은 계약에 대한 보상을 받아 가신 상태이기도 하고요.”
“그 보상에 대한 보상을, 제가 어떻게 해 볼 수는 없을까요?”
“그림 군의 계약을 인수하시겠다는 뜻입니까?”
“…….”
“좋습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자리가 좋지 않으니 자리를 옮기죠.”
아즐이 웃으며 앞서 걸어갔다. 제대로 유키를 자신의 예비 고객으로 대우하려는 듯, 유키에게 맞춰 발걸음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제대로 배려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면서, 아까 전에는 일부러 배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유키의 기분은 바닥을 쳤다.
‘이 사람 뭐야?’
사람을 자신의 쓸모에 따라 재고 따지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유키 자신도 필요할 때는 다른 사람을 그렇게 대하곤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굴다니.
‘다른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보이지 않는 속물이잖아!’
그렇게 생각했다가, 유키는 곧 제 생각을 고쳐먹었다. 저 사람, 옥타비넬의 기숙사장 아즐 아셴그로토라 했던가? 그의 교내 평판에 대해 제대로 들어보진 못했지만, 유키를 아끼는 선배들에게 리치 형제처럼 ‘요주의 인물이니 가까이 다가가지 마라’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평판이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그의 평판이 나쁘지 않다는 사실은 적어도 유키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잘 대한다는 뜻이다. 유키에게는 그 사실이 더 비호감을 불러일으켰다. 사람의 급을 따져 나눈다는 뜻 아닌가.
아즐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유키는 화를 바깥으로 드러내거나 하지 않았다. 외려 속으로 분노를 삭히며 아즐이 안내하는 대로 VIP실로 들어갔다. 겁먹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긴장을 풀고, 당당한 걸음으로 상석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아즐이 조금은 의외라는 듯 스스로 손깍지를 꼈다.
“긴장하지 않는군요.”
“제가 긴장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계약의 내용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에서는 긴장하는 게 보통이죠.”
아즐이 싱긋 웃었다.
“혹은 두려워하거나요.”
꼭 유키가 이 상황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를 깨달은 유키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그럼, 쥐고 있는 패도 없는 상황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이상하지.’
이런 상황 자체를 즐기지는 않더라도, 자신이 불리한 위치에 있는 상황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제 속내가 다 까발려진 것 같은 느낌에 유키가 못마땅한 눈으로 아즐을 흘겨보았다.
“뭐, 일반론의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화이트 씨는 그러지 않으시겠죠.”
“일반론이 항상 맞는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 우리에게는 일반론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 텐데요?”
“성질도 급하시지.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있지요.”
아즐이 눈매를 부드럽고 늘어뜨리고 웃었다. 유키도 함께 눈을 접어 웃었지만 둘의 눈동자는 차가운 빛을 띄고 있었다. 아즐 또한 그것을 모르지 않았는데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을 이어갔다.
“그래…… 그림 씨의 계약 말입니다. 화이트 씨가 취소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는 이미 계약의 대가를 수령했으니까요.”
“아까 전에 말하셨던 것처럼, 제가 그림의 계약을 인수하는 것도 불가능한 건가요?”
“오, 그것도 가능은 하지요. 다만,”
다만?
‘또 무슨 치사한 조건을 덧붙이려고.’
유키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아즐을 바라보았다.
“유키 씨는 외부 장학금을 받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전과목 성적 총합이 B 이하라면 다음 학기 생활비 장학금을 수령하지 못하시는데, 틀린가요?”
“……정보력이 무척 좋으시네요. 네. 맞아요. 그래서요?”
“그림 군의 조건은 ‘성적이 낮은 그림 씨가, 족보의 도움을 받아 성적을 일정 이상 향상 시키는 것’입니다. 화이트 씨는 마법을 쓰지 못하면서도 항상 전 과목 성적 총합이 A, 말하자면 전교 10% 안에 드는 수재시지요.”
“그래서, 추가로 지불 하길 원하는 것이 뭐죠?”
“역시 이해가 빠르군요. 그런 화이트 씨에게 그림 군의 계약을 그대로 인수해 드리는 것은, 역시 수지타산이 안 맞죠. 그러므로…….”
아즐이 순수하게 호의를 베풀려는 듯한 얼굴로 웃었다. 눈빛마저 웃고 있는 부드럽고 달콤한 표정이었다. 원래 세계에 있던 유키였더라면 얼굴에 홀려 넘어갈 정도로 고운 웃음으로, 아이돌들이 하는 것처럼 며칠을 거울을 보며 연습한 것처럼 예쁜, 사람에게 호감을 사는 미소였다.
그러나 그런 미소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가 내뱉은 말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화이트 씨는, 낡은 기숙사의 사용권 정도는 거는 것이 어떠신지.”
“거절할게요.”
생각할 필요도 없었기에 바로 답했다. 유키는 습관적으로 짓고 있던 웃음을 거두고 무표정한 얼굴로 아즐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바로 거절의 말을 받을지 몰라 당황했지만, 아즐은 감정을 숨기고 같은 얼굴로 계약을 종용했다.
“어차피 B 학점 이상을 받기 위해서는 상위 50등 안에 드셔야 할 텐데요? 화이트 씨에게는 쉬운 일이지 않습니까?”
“확실히, 어려운 일은 아니네요.”
“그렇죠. 그림 씨에게 앞으로의 혜택을 거저 드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조건입니다.”
“그래도 거절할게요.”
아즐은 유키의 표정을 살폈다. 표정을 숨기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유키 또한 고작 열여섯 살 소녀일 뿐이다. 평소 다정함과 상냥함을 품고 있는 눈빛에 적대적인 감정이 엿보였다.
‘저런, 생각 정도는 하고 사는 줄 알았는데.’
아즐이 속으로 쯧, 하고 혀를 찼다.
“아즐 씨의 말씀처럼 저에게는 쉬운 일이네요. 그림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건 기특한 일이지만, 그림은 저에게 ‘도와달라’고 말하지 않았는데요.”
“둘이서 하나, 라고 해놓고선 겨우 그런 핑계로 빠져나가시려는 겁니까?”
“어떻게 생각하시든 상관없어요. 저에게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거든요.”
아즐이 풋,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즐이 생각하기에 지금은 도저히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니었다.
‘가끔 이런 사람들이 있지. 자존심 세울 때와 안 세울 때를 구분 못 하는 사람이.’
그 정도의 계산도 없이 이곳을 찾아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유키 화이트는 역시 어렸다. 어린 만큼 감정적이기도 하고. 아즐 아셴그로토는 유키 화이트에 대한 평판을 떠올렸다. 도무지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남을 도울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남을 도와주는 사람. 말이야 좋지만,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인간상이다. 오히려 위선으로 가득한 옆 학교라면 모를까. 오늘의 대화로 유키 화이트가 이리저리 뜯어먹히기 좋은 무른 인간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긴 했지만, 정말로 그뿐이었다.
‘로열 소드 아카데미에 갔으면 편하게 살았을 텐데.’
그곳에는 유키 화이트와 같이 운 좋게 살아온 멍청이들이 산재해 있으니 말이다. 아즐이 속으로 유키를 비웃든 말든, 유키는 조금 짜증스러운 얼굴로 아즐을 노려보았다.
“제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남의 도움을 받아 해나갈 필요 없어요. 그림의 대가는 그림이 치르겠죠. 저는 얻을 것 없는 장사네요.”
“내기에서 지는 것이 두렵습니까?”
“그럴 리가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선배가 저를 얼마나 멍청하게 보셨는지 알 것 같아서요. 그런 사람이랑은 굳이 협력하지 않는 주의라.”
유키는 그 말만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가운 눈으로 아즐을 흘긋 보고선 등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책 잡히는 일 만들지 않겠다는 듯 곱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럼, 다시는 볼 일 없으면 좋겠네요. 감사했습니다. 아셴그로토 선배.”
문이 닫히고, 아즐이 헛웃음을 지었다. 유키 화이트에 대한 평가를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유키 화이트는 가진 것 없으면서 콧대만 높은 여자다.
그리고 그는 공교롭게도, 아즐이 가장 싫어하는 부류였다.
*
그림은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야 낡은 기숙사로 돌아왔다. 팔에는 유키가 본 회청색 자습서가 끼워져 있는 채였다. 그 자습서를 보자마자 유키는 온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아즐과의 대화에서 그림이 아즐과 계약을 했다는 정보는 이미 얻었지만, 새삼스럽게 그 증거를 보게 되자 절망적인 기분이 된 탓이다.
“하아, 정말 지쳤다구⋯⋯. 유키! 오늘 저녁 뭐냐구!”
낡은 기숙사의 식당에 망연하게 앉아 있는 유키를 보고선 그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키는 의아한 그림의 표정을 잠깐 쳐다보다, 쪼그려 앉아 그림과 눈을 맞췄다.
“그림. 나한테 뭐 할 말 없어?”
그림은 바보 같은 표정으로 유키를 바라볼 뿐이었다. 뭔가 잊은 게 있나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유키에게까지 들렸다. 유키가 그림이 체결한 계약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상상 못하는 것 같았다.
“다녀왔습니다⋯⋯.?”
“그거 말구.”
“훔⋯⋯. 아! 유키는 오늘 혼자 공부 잘했냐구! 역시 이 몸이 없으니 힘들었지!”
그 말을 듣자마자 유키는 맥이 빠져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림이 순순히 말해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태연하게 거짓말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배신감을 느끼고 화를 낼 힘도 없었다.
‘그래도 이런 중요한 건 말해줘야 도와줄 수 있는데.’
그림을 설득해 볼까, 잠깐 고민하던 유키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림이 도와달라 하지 않았는데 비밀로 하는 일을 들추고 억지로 도움을 줘 봤자 고마워하지도 않을 게 뻔했다. 유키는 그냥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저녁 메뉴는 카레야.”
“우와! 맛있겠다구!”
“어제의 소고기 스튜에 카레가루를 더한 것 뿐이지만⋯⋯ 그림, 나 좀 쉴 테니까 저녁은 좀 있다가 먹자.”
“어디 피곤하냐구!”
“그냥 좀. 피곤하네.”
유키는 비척거리며 식당에서 나가버렸다. 졸지에 식당에 혼자 남게 된 그림이 방문 바깥에서 두 파트너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고스트들에게 질문했다.
“고스트들아. 유키 왜 저러는지 아냐구? 어디 아픈 거냐구!”
“오늘 좀 늦게 들어오긴 했는데⋯⋯ 뭔가 고민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그림 도령이 물어보렴!”
“알겠다구~! 밥 먹으면서 질문해 볼 거라구!”
간단히 넓은 그릇에 밥을 퍼 둔 그림은 자신과 유키의 방으로 달려갔다. 유키는 졸리기라도 한 건지 벌써 잠옷으로 갈아입은 이후였다. 침대에 엎어져 있는 모습이 피곤해 보이기도, 조금 우울해 보이기도 했다.
“유키! 밥 먹⋯⋯ 무슨 일 있냐구!”
트위스티드 원더랜드에 온 이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모습이었다. 유키는 반드시 집에 돌아갈 것이라고 다짐하기나 했지 이렇게 우울해하는 얼굴은 그림에게도 보여준 적 없었다. 그림이 깜짝 놀라 침대 위로 올라섰다. 침대에 얼굴을 묻은 유키의 머리맡에 앉아 걱정스러운 눈길로 유키를 쳐다보았다. 유키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웅얼거렸다.
“그림. 나한테 뭐 거짓말 한 것 없어?”
“어, 없다구! 이 몸이 뭐하러 부하한테 거짓말을 하냐구!”
“정말로?”
“진짜라구! 왜 그러냐구! 누가 무슨 말 했냐구!”
“그렇구나⋯⋯.”
유키가 힘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바보 고양이.’
유키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필사적으로 숨기면 모르는 사람도 다 알게 될 텐데, 그림은 그런 것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 순진함이 이 마수의 귀여운 점이기도 하나, 그 거짓말을 하는 대상이 자신이었기 때문에 유키는 그를 좋게만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며 그림을 추궁하기에는, 말다툼이 길어질 것 같았다. 유키는 정말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되도록이면 그림에게 싫은 소리는 하고 싶지 않았고, 화가 난다 해서 마구 혼내고 싶지 않았다.
겨우 거짓말 한 번이지 않은가. 유키는 자신이 원래 세계의 부모님께 했던 수없는 사소하고 커다란 거짓말을 떠올렸다. 원래 세계의 가족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았다. 유키가 훌쩍거리자 그림이 당황해서 유키의 어깨에 앞발을 올렸다.
유키는 힘없이 일어났다.
“으응⋯⋯ 저녁 먹자. 카레 먹고서는 양치 바로 해야 해.”
“알고 있다구!”
아무것도 모르는 그림이 힘차게 외쳤다.
* *
마법 약학 수업, 유키는 절구로 곱게 간 풀물로 500ml의 용액을 만들었다. 용액 속 성분의 농도를 알기 위해 일부를 채취해 적정할 예정이었다. 피펫에 용액을 적당량 채워넣고 있는데 같은 조의 제이드가 질문했다.
“아즐에게 들었습니다. 계약을 거절하셨다고요?”
“⋯⋯딱히 할 이유가 없는 계약이었으니까요.”
유키는 한숨 쉬고 싶은 심정으로 말했다. 그 옥타비넬의 기숙사장이나 이 곰치 쌍둥이와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학점이 낮으면 외부 장학금이 끊기기에 할 수 없이 성실하게 수업에 참여하고 있긴 하지만, 한 학기 동안 제이드와 같은 조로 실험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 수업을 포기할까 싶기까지 했다.
제이드가 비웃듯 말했다.
“저런, 자기과신은 별로 좋은 버릇이 아니랍니다.”
“자기과신은 아닐 걸요. 저한테는 필요없는 게 사실이잖아요?”
“그런가요? 후후. 그래도 고민이 생기신다면 언제든 모스트로 라운지에 찾아오시길. 언제든 당신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이번 학기에만 해도 몇 번이나 들어본 영업 멘트다. 평소에는 돈이 없다거나 지불할 수 있는 대가가 없다는 말로 넘겼는데, 이번에는 그런 말로 넘길 수가 없었다. 제이드가 눈을 접어 웃으며 말했다.
“고민이 있으신 눈치로군요.”
“⋯⋯그래도 모스트로 라운지에는 안 가요.”
“저런, 어째서인가요? 모든 걸 혼자서 해결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시진 않을 것 같은데.”
“오히려 제가 선배들에게 여쭤보고 싶은데요.”
“무엇을, 말입니까?”
질문이 전혀 예상가지 않는다는 듯 질문하면서도 제이드는 무척 즐거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유키는 제이드를 쳐다보지도 않고 실험 준비를 끝냈다. 제이드가 적정 실험을 위한 용액이 든 플라스크를 가져오자 유키는 제이드를 흘겨보며 말했다.
“선배들은 제가 가엾거나, 열심히 하는 모습이 예뻐서 도와주려고 하시는 건 아니잖아요? 이 학교에는 그런 사람 자체가 없는 것 같던데.”
“확실히 그렇죠. 저희가 자원봉사자는 아니니까요.”
“그럼 그건 도움이 아니라 거래죠. 대가로 드릴 수 있는 게 없는데 어떻게 거래를 하나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유키 씨는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면이 있네요.”
제이드가 피펫으로 플라스크 안에 한 방울씩 시약을 옮겼다. 유키는 제이드가 집중할 수 있게 입을 다물었다.
“3.5ml입니다.”
“기록해 뒀어요. 아무튼, 저는 오히려 선배들이 저를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다고 생각해요. 지불할 수 있는 것도, 도움이 될 만한 능력도 없으니까요.”
유키가 말을 마칠 즈음 크루웰 선생이 다가와 소리쳤다.
“Bad Boys! 소곤소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실험은 모두 끝냈나?”
“예. 기록도 끝냈습니다.”
제이드가 유키가 작성하던 보고서의 차트를 크루웰 선생에게 내밀었다. 차트를 확인한 크루웰 선생은 제이드와 유키를 가볍게 칭찬하고 다른 조의 실험 현황을 확인하려 자리를 떴다. 긴장이 풀렸는지 작게 한숨을 쉬는 유키에게 제이드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원하지 않는 사람과 억지로 거래하진 않는답니다.”
“그러면 좋겠지만요.”
“믿지 못하시는 것 같아서 아쉽네요.”
제이드가 훌쩍거리며 과장된 울음소리를 냈다. 유키는 그 거짓된 울음소리를 전혀 듣지 못한 척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