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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3. 너를 버릴 수 없어

“어이, 유키 화이트. 정신 좀 차려봐.”


옥타비넬에서 거울사로 쫓겨나고 나서도 유키는 한참을 망연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런 유키를 보고 있자니 잭은 괜히 신경이 쓰였다. 어차피 이 일을 알게 된 것도 유키에게 휘말려서이긴 하지만, 누가 봐도 상처가, 충격이 커 보이지 않는가. 잭은 멍청한 얼굴로 허공을 쳐다보는 유키의 어깨를 툭툭 쳤다.


“하아…… 그림은 어떻게 된 걸까.”

“너, 그런 녀석 잘도 신경쓰는군.”

“그럼 신경을 안 쓰겠어?”


톡 쏘는 말에 잭이 머쓱하게 시선을 돌렸다. 감독생과 마수의 사이가 좋다는 말은 들었지만, 레오나와 라기 정도의 관계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잭이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달랐다. 잭이 아는 관계 내에서 생각해 보자면 잭과 잭의 동생의 관계와 그나마 비슷해 보였다. 그렇지 않다면 이리 큰 배신감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잭은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정신 차려. 낡은 기숙사까지 데려다 줄게.”

“잭 군은 신사구나.”

“그런 게 아니야. 그러고 다니다가 네가 다치면 네 친구에게 추궁받는 건 나라고.”

“에펠 말이구나. 에펠은 좋은 친구지.”


잭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펠의 이야기가 나오자 유키가 힘없이 웃었다. 낡은 기숙사는 거울사를 돌아 나와서도 한참을 걸어야 있었다. 에펠에게 듣기로 평소의 유키는 재잘대기 좋아하는 밝은 친구였는데, 기분이 쳐져 있는 것을 보니 그닥 보기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잭에게는 여자아이를 기쁘게 할 만한 화술 따위는 없었다. 그러므로 잭이 화제를 돌리기 위해 고른 주제는 최악의 것이었다.


“그 말미잘들은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고 싶어서 아즐과 계약했고, 그대로 속았다…… 그런 것 같군.”

“모두가 50등 안에 들 수는 없으니까, 그걸 노린 걸까.”


유키가 중얼거렸다. 잭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생각해보아도 분통이 터지는 일이다. 정당하게 경쟁하여 받은 성적이라면 어떤 등수라도 인정할 수 있었지만, 이런 일을 정당한 경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잭이 주먹을 꽉 쥐고 말을 쏟아냈다. 어느새 잭도 유키를 위로해주는 것보다는 제 분노를 토로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남의 힘으로 좋은 성적을 받아도 아무런 의미 없잖아! 제 힘을 주위에 보여줄 기회를 헛되이 하는 것이야말로 바보다.”

“그림도 잭처럼 기특한 생각을 했더라면 좋을 텐데.”

“이 학원의 학생 전원이 하울 군처럼 자의식이 강해 성가…… 아니, 성실하다면 저도 이렇게까지 고생하진 않겠지요.”


언제부터 함께 걷고 있었던 걸까? 한숨을 쉬는 유키 옆에 어느새 학원장이 나타나 같이 걷고 있었다. 잭이 갑자기 나타난 학원장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우왁! 학원장!”

“기척 좀 내고 다니세요. 남의 대화에도 갑자기 끼어들지 마시구요.”


유키가 학원장을 흰 눈 뜨고 보았다. 노려보는 눈길이 제법 매서웠지만 학원장은 그 어떤 타격도 입지 않고 한숨이나 쉬었다.


“하아…… 올해도 아셴그로토 군의 ‘장사’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작년에도 이 비슷한 일이 있었죠? 그렇죠?”

“음? 잠시만. 화이트 군은 그걸 어떻게 아는 겁니까?”


‘혹시 화이트 군도 그 장사를 도운 건 아니겠지요?’


학원장은 눈에 그런 의문을 담고 유키를 쳐다보았다. 이 사람 자기 학교 학생들을 얼마나 안 믿는 거야. 유키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는 유키가 한숨을 쉴 차례였다.


“레오나 씨가 그림의 계약에 관해 어차피 일주일 뒤면 알게 될 거라고 하셔서요.”

“하아~ 그렇습니까. 그럼 아즐 군에 관해서부터 소개를 해야겠군요. 긴 이야기가 될 테니 차라도 대접해주시지 않겠어요.”


낡은 기숙사 앞에 도착한 학원장이 뻔뻔하게 말했다. 유키는 기가 막혀서 학원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족보 장산지 뭔지 때문에 장학금 떨어질 것 같아서 긴축재정이에요.”

“성적을 간단히 산출해보니 외부 장학금은 그대로 유지될 것 같더군요. 저는 홍차가 좋겠습니다.”


학원장의 뻔뻔함은 어이가 없었지만 외부 장학금이 유지된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어쨌건 마법적 지식을 지닌 비마법사의 필요성을 주장해 외부 재단의 장학금을 연결해 준 사람이다. 조금은 뻔뻔하게 굴어도 트위스티드 원더랜드에서의 생활을 마련해준 사람이니만큼 너무 각박하게 굴 필요도 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저 뻔뻔함은 역시 짜증나.’


유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캐모마일 티 우려 드릴게요. 심신의 안정이 필요해서요.”

“이제는 제법 기숙사 대표의 티가 나는군요. 학기 초에는 어떻게 하나 싶었지만! 역시 제 안목이 옳았습니다.”

“예, 예. 그러시겠죠.”


유키가 불퉁하게 대답하고선 낡은 기숙사 안으로 먼저 들어가 버렸다. 잭이 제 기숙사로 돌아가려 하자 학원장이 웃으며 낡은 기숙사의 담화실로 끌고 들어갔다. 당황스러웠지만 정신을 차리고 나니, 잭은 학원장과 함께 유키가 내준 차를 마시고 있었다. 돌아가야겠다는 말을 할 타이밍을 놓쳐서 뻘쭘하게 앉아 있자 유키가 학원장의 맞은편에 앉아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아셴그로토 씨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아즐 아셴그로토 군. 옥타비넬 기숙사 기숙사장을 맡고 있는 2학년입니다. 로즈하트 군과 함께 2학년으로서 기숙사장인 월등하게 우수한 학생입니다만…….”

“속물에 계산적인 사람처럼 보이던데요.”

“어이, 유키! 그런 말…….”

“듣는 사람도 없는데 뭐 어때? 정신 연령이 초등학생보다 못한 애 꼬셔서 사기 계약하는 사람이 계산적인 사람이 아니고 뭐야?”


잭의 걱정에 유키가 샐쭉하게 답했다. 잭과 학원장이 깊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 사기 계약. 그런 거, 학원장이 명령해서 그만두게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것이…… 제가 교사이기 때문에 그 내기를 금지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아셴그로토 군이 학생들에게 준 기말고사 대책 노트 말입니다만…… 그것, 사전에 시험지나 답을 훔쳐보는 등의 부정행위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선배들에게 물려받은 것도 아니고요.”


유키가 인상을 썼다. 부정행위나 선배들에게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면 자기가 직접 만들기라도 했다는 건가?


“그 노트,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 과거 100년 분의 시험 문제 경향을 철저하게 조사하여 자력으로 만든 자습서입니다.”

“자력으로 그런 것 만들다니, 꽤 하는 녀석이잖아?”

“……생각보다 대단한 물건이었네요, 그 족보.”


그런 것의 도움이 있었으니 그림이 평균 85점을 넘길 수 있었던 거구나. 유키가 한숨을 푹 쉬었다. 간만에 성실히 공부하는 것 같더니, 결국에는 ‘이걸로 공부하면 시험을 잘 칠 수 있다.’라는 확신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확신을 나는 못 줬던 거란 말이지.’


유키가 씁쓸하게 생각하는 사이 잭이 인상을 쓰며 학원장에게 질문했다.


“부정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라는 건가.”

“잘 짚었습니다. 하울 군. 교사로서 학생이 ‘합법적인 노력’을 통해 노트를 만드는 것을 금지할 수 없지요. 그리고 ‘친절’하게 친구에게 공부를 알려준다는 것도 말입니다.”

“그것을 금지한다면, ‘공부하지 마.’라거나, ‘친구와 협력하지 마’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까. 성가시군요.”


학원장과 잭이 말하는 요지는 알 만하다. 자신의 노력을 통해 자습서를 만들고, 그것을 정당한 대가를 받고 파는 것을 금지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특기인 마법을 받아가는 것이 정당한 대가를 받고 파는 것인지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지 않나. 유키가 그렇게 생각하며 질문했다.


“작년에는 어땠길래요?”

“작년에는 그 노트의 소문이 그렇게 퍼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정도로 큰 소동이 되지는 않았습니다만…….”

“올해는 ‘누가 일부러 퍼트린 것처럼’ 노트에 대한 소문이 퍼져있었다는 거군요.”


유키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끈질기게 자신을 쫓아다니며 계약을 종용하던 리치 형제의 얼굴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질문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유키에게 계약을 종용한 것처럼 그들이 노트에 대해 소문을 냈을 테니까.


“그리고 계약 사항을 위반하면 어떤 꼴이 될지는 계약 조항 발설 금지 의무가 있어서 퍼지지 않았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결과적으로 올해는 아셴그로토 군과 거래하는 학생들이 속출해서, 전 학년·전 교과의 평균점이 90점을 넘는 사태가…….”

“어떻게 생겨먹은 학교가…….”


유키가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는 트위스티드 원더랜드 굴지의 명문 마법사 양성학교라고 하지 않았던가? 굴지의 명문 마법사 양성학교는 무슨, 대부분의 학생이 불성실한데, 명문이라는 이름이 울 테다.


“그럼, 작년 그 사람과의 내기에서 진 녀석은 아직도 계속 능력을 빼앗긴 상태라는 겁니까?”

“그것이, 그는 작년, 학생들에게서 빼앗은 능력을 돌려주는 조건으로, 학원 내에서의 「모스트로 라운지」의 경영 허가를 요청했습니다.”

“무, 무슨 사람이…… 학원장을 협박해서 거래를 하다니. 그 레오나 선배가 가까이 하기 싫어하는 이유가 있었군.”

“게다가 매상의 10%를 학원에 상납하겠다는 조항까지 추가해 와서 더이상…….”

“결국 학원장은 할 말 없는 거 아니에요?”


유키가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학원장이 충격받은 얼굴로 “화이트 군! 저는 당신을 그렇게 키우지 않았습니다!” 따위의 말을 쏟아내었지만 유키는 완전히 무시했다.


“매상의 10%를 상납하는 조항이 있다면 계약으로 잡아온 학생의 10%도 거저 풀어줄 수 있겠네요. 그걸로 풀어주세요.”

“10%의 학생들만을 풀어준다면, 남은 90%의 학생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바보 같은, 아니, 불쌍한 학생들을 위해서라면 저는 또 그의 요구에 응하고 말겠지요. 저, 상냥한 교육자니까요!”

“이번 일은 저한테 떠넘기지 마세요. 저도 그림한테 화가 많이 났거든요.”

“일을 떠넘기다니요. 화이트 군. 이런 짓을 그만두도록 아셴그로토 군을 설득해주는 일은, 교사인 제가 할 수 없는 일이랍니다. 화이트 군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저도 못 하는데요.”


유키 화이트. 이번에는 정말로 거절하려고 했다.


“하아…… 최근 낡은 기숙사의 식비가 상당히 불어나고 있어서 말이죠. 예산이 적은데…… 어디의 누구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기 위해 조사를 하고 있는 탓에 문제 해결에 쏟을 시간이…….”

“애초에 그 조사, 하고 있는 거 맞아요? 조사 자료라도 보고 싶은데요.”

“화이트 군! 어쩌다가 이렇게 사람을 못 믿는 아이가 되었단 말입니까! 이 학원장, 화이트 군을 그렇게 키우지 않았습니다!”

“하…… 알겠어요.”

“그렇게 계속 거절한다면……! 네?”

“알겠다고요. 할게요.”


유키가 따뜻한 캐모마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허브티를 그렇게 마셔서는 진정되지 않을 것이 뻔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설득하거나 거부해봤자 통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유키는 잘 알고 있었다. 어느새 유키의 얼굴에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돌아와 있었다.


“어차피 이런 잡일 맡아줄 사람, 학원의 미소녀 해결사 유키 화이트밖에 없으니까요.”

“와, 자기 입으로 미소녀라고…….”

“잭 군은 나한테 불만이라도 있는 걸까?”


유키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잭을 노려보았다. 기백에 질린 잭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그렇지?”


유키가 환하게 웃었다.




* * *




학원장과 잭이 돌아가고 난 이후로부터 한참이 지났지만 그림은 기숙사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예 유키가 싫어져서 다른 기숙사로 가버린 걸까? 그 「모스트로 라운지」라는 곳에서 일하느라 정신이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림의 생각을 하며 유키는 교복도 갈아입지 않고 냅다 침대에 누웠다. 낡은 기숙사의 고스트들이 유키를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까 학원장과 잭 앞에서는 강한 척했지만, 유키도 생각보다 많은 심력이 소모되었다. 유키와 그림을 계속 지켜본 고스트들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유키, 괜찮니?”

“안 괜찮을 건 뭐가 있겠어요.”

“그림 도령과 또 싸운 거야?”

“싸운 건 아니에요.”


유키가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저었다. 오늘의 그 소동을 ‘싸웠다’라고 표현할 수는 없었다. 유키의 잘못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그림의 자업자득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림이 유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서, 끝까지 유키에게 거짓말을 해서. 그림을 그곳에서 꺼내오지 않은 것은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고 그림을 머리에서 치워버릴 수 없었다.


낡은 기숙사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낡은 기숙사의 문을 두드릴 사람은 바보 트리오밖에 없다. 에이스와 듀스는 하츠라뷸로 돌아갔을 테니 남은 인물은 그림뿐. 유키가 후다닥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그림!”

“다녀왔습니다…… 힘들다구…….”

“어디 맞았다거나 뭔가 뺏기진 않았지? 괜찮아?”

“엄청 일 시켰다구…… 근육통이익―!”

“―이 바보 고양이!”

“고양이 아니라구!”


유키가 그림의 어깨를 잡고 번쩍 들어올렸다. 그림의 몸이 길게 늘어났다.


“그런 위험한 계약을 왜 한 거야! 이 바보!”

“몰라! 부하는 모른다구!”


그림이 울상으로 바둥거렸다. 바둥거리는 그림에 유키가 그림의 어깨를 단단히 잡았다. 유키도 이렇게 그림을 혼내는 것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번쯤은 따끔하게 혼내야 했다. 그래야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을 테니까.


“뭐어? 내가 뭘 몰라.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은 건 그림이면서!”

“나님도 부하 도움 없이 잘 하고 싶었다구!”


말하면서 감정이 북받쳤는지 그림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유키도 울고 싶었다. 학원장 앞에서는 자기가 이번에도 해결해 보이겠다며 큰소리 쳤지만 유키도 아즐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계약을 하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게 유키 혼자였기 때문이다. 그림만 빼내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만, 다른 학생들까지 다 구해내야 하는 입장에서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부하는 언젠가 집에 돌아가야 한다고 했잖아! 그럼 나님은 혼자가 되는 거라구! 그러면 부하 없이도 혼자서 잘 해야 한다구…….”


유키는 입도 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당연히 언젠가는 지구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간 이후 혼자 남을 그림과 다른 친구들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유키가 없어도 당연히 잘 지낼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림이 외로울 것이라고는, 모두가 유키의 빈자리를 느낄 것이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거야 유키는 트위스티드 원더랜드에, 새로 사귄 친구들에게 정을 주지 않으려고 했으니까.


지금껏 유키는 트위스티드 원더랜드에 제 자리 따위는 없다고 생각해 왔었다. 빈 자리를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서 자기 자리를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태어나서부터 당연하게 마련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었다. 정 따위는 주고 싶지 않았다. 모두를 적당히 대하면서 서로의 부재에 상처받지 않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던 것이다.


어느새 이 세계를, 새로 사귄 친구들을, 그림을 아끼게 되었기 때문에.


“그리구, 그리구 멋진 형님은 부하를 지켜주는 거라구. 유키는 마법도 못 쓰면서 뭐든 혼자 하려고 하니까, 나도 유키한테 도움이 되고 싶었다구…….”


그 말에 유키도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키가 그림을 끌어올린 그대로 꼭 껴안았다. 엉덩이를 받쳐 어린아이 안듯 그림을 안고 등을 토닥였다. 그림이 서러운 듯 더 크게 울었다. 멀리에서 두 파트너가 우는 모습을 쳐다보던 고스트들이 슬금슬금 곁으로 다가왔다.


“말하지 그랬어…… 말하지 그랬어 그림…….”


유키가 울며 중얼거렸다. 품에 안긴 그림이 고개를 흔드는 게 느껴졌다.


한참을 그렇게 끌어안고 있다가 유키가 그림을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눈물 콧물 범벅으로 그림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유키가 그 모습을 보고 힘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림 우니까 못생겼다. 머리가 더 커진 것 같아.”

“유키 얼굴도 엉망이라구.”


유키가 제 얼굴을 보고 웃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림이 삐죽거렸다. 유키는 화장지를 뽑아다 그림의 얼굴에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림이 훌쩍거리며 중얼거렸다.


“나님은 성적 잘 받아오면 유키가 좋아할 줄 알았다구…….”

“성적 잘 못 받아와도 나는 그림을 좋아해.”

“그래두, 킁, 부하한테 도움이 되고 싶었다구. 나는 형님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위험한 짓을 하면 돼, 안 돼.”

“안 혼내도 안다구. 다 망했다구. 머리에 말미잘이나 자라구…….”


그림이 다시 우아앙 소리를 내며 서럽게 울었다. 유키가 한숨을 쉬며 엉엉 우는 그림을 끌어안았다.


“울지마, 그림.”

“그치만! 악덕 사장한테 노동 착취나 당할 거라구. 나님 앞으로의 학교생활이 어둡다구!”

“내가 널 그렇게 되게 둘 것 같아?”


유키가 짐짓 화난 척 되물었다. 그림이 놀란 얼굴로 질문했다.


“안 도와줄거라고 한 건 유키라구!”

“그거야 그림도 고생을 좀 해 봐야 이런 짓을 다시는 안 벌일 테니까.”

“유키 나쁘다구! 아주아주 나쁜 부하라구!”


그림이 억울한지 허공에 사지를 휘적거렸다.


“그래, 그림. 내일은 아주 긴 날이 될 테니까, 일단 오늘은 쉬자.”


유키가 엉망진창이 된 그림의 털을 빗기고 잠옷을 건네주었다. 제 품에 안겨 잠든 그림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자 화가 치밀어올랐다. 제 자신과 아즐에 대한 분노였다.


그림을 그렇게 불안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지구에 대한 생각과 걱정으로 트위스티드 원더랜드에 있는 친구들을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유키로서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해 제 작은 파트너를 불안하게 했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 불안이 가져온 결과를 보라. 아무리 학교의 대부분이 아즐과 계약을 했다 해도, 이번 그림의 계약은 유키가 그림을 불안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자책이 밀려왔지만 자책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유키는 제 방에서 두 발 뻗고 자고 있을 아즐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절대로 가만 안 둬. 반드시 복수한다, 아즐 아셴그로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