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고사 마지막 날, 평소보다 30분 일찍 일어난 유키는 부스스한 머리로 방을 나섰다. 평소에는 깨워도 잘 일어나지 못하던 녀석이 갑자기 사라져서 걱정이 된 탓이다. 유키가 수습할 수 있는 사고라면 괜찮지만, 그러지 못할 사고를 칠까 걱정되기도 했다. 유키가 부스러질 듯 하얀 머리카락을 산발한 채 복도를 걸어가자 복도를 배회하던 고스트들이 비명을 질렀다.
“히익―! 아, 뭐야. 유키니?”
“고스트라도 본 얼굴이네요. 고스트는 본인이면서.”
유키가 입을 삐죽였다. 고스트가 미안하다며 반투명한 손으로 없는 머리를 긁적였다. 유키는 여전히 졸린 눈을 비비며 고스트에게 질문했다.
“그것보다, 그림 못 봤어요?”
“그림 도령 말이니? 1층 공부방에서 책을 읽는 것 같던데.”
“그림이 공부를요?”
믿기지 않는다는 투였다. 하츠라뷸의 바보 듀오와 함께 제법 성실하게 공부를 하는 것 같았지만, 그림이 공부하는 모습을 제 눈으로 한 번도 보지 못한 탓이다. 유키가 부은 눈을 땡그랗게 뜨자 고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자습서를 읽고 있는 것 같던데. 방에 들어오지 말라고 해서 잘은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림이 요새 우리한테 부쩍 비밀이 많아진 것 같지 않아요?”
“아이의 성장이란 그런 법이니까!”
“어른 같은 말을 하시네요.”
“히힛, 유키와 그림 도령보다는 훨씬 나이를 먹긴 했지!”
고스트는 그렇게 말하며 날아가버렸다. 낡은 기숙사의 고스트는 나이를 먹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있는 일이라고 말했지만, 유키는 괜히 찜찜한 마음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유키는 그림이 어떤 거짓말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저 몰래 위험한 사람과 계약을 해버린 그림이 어떤 대가를 치뤄야 할지 모른다는 점이 유키를 불안하게 했다.
유키는 1층의 공부방 문을 노크도 않고 냅다 열었다. 불안을 숨기지 못한 탓인지 손속이 평소와는 달리 거칠었다. 문을 거칠게 여는 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로 그림은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엇다.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외우는 모습이 기특하기도 했으나, 유키로서는 제가 방에 들어온 것도 모르는 것이 조금은 서운했다.
“응용 문제의 경향은⋯⋯ 2개 선택지가 있으면 처음 눈에 들어온 것으로 찍어서⋯⋯.”
“그림, 설마 아침부터 공부하는 거야?”
그림의 손에는 역시나 회청색 자습서가 들려 있었다. 그림이 소스라치게 놀라 자습서를 숨기고 유키를 돌아보았다. 자습서는 제법 큰 크기였기 때문에 조그마한 그림의 덩치로는 제대로 숨겨지지도 않았다. 유키는 한숨을 쉬고 싶은 마음을 애써 내리눌렀다. 숨길 거면 제대로 숨길 것이지, 이게 뭔가.
‘그림. 다 보여.’
속으로 한숨을 쉬고 있자 그림이 깜짝 놀라서 빽 소리를 질렀다.
“으악! 갑자기 말 걸지 말라구! 외우던 거 다 잊어버리게 된다구!”
“벼락치기 한다고 해서 그림의 성적이 나아질 것 같진 않은데.”
“그건 마지막까지 해 봐야 아는 거라구~! 유키는 이번에 내 발목이나 잡지 말라구!”
그림이 바락바락 화를 냈다. 아즐이 그림에게 거래의 대가로 준 족보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믿는 구석이 있나 보다.
‘그런 것보다 평소의 노력이 훨씬 더 중요한데.’
평소에 노력하지 않고 요행을 바라는 것은 결국 자신의 실력을 높이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유키는 팔짱을 낀 채 흥, 콧방귀를 뀌었다.
“그림에게는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은걸. 아침 먹고 시험이나 보러 가자.”
“와! 시험 날 아침이니까 특식으로 참치캔 어떠냐구!”
“참치캔은 저녁에. 고생하고 먹는 게 더 맛있잖아?”
“그것도 그렇다구. 밥 먹고 옷 갈아입고 가자구!”
* *
“거기까지다, 강아지들. 순순히 펜을 놓고 답안지를 앞으로 보내도록.”
3교시 ‘점성술의 기초’를 마지막으로 모든 시험이 끝났다. 펜을 놓은 학생들이 각자 작성한 답안지를 앞으로 전달했다. 답안지의 개수를 확인한 크루웰 선생이 답안지를 정리하며 말했다.
“A반의 기말고사는 이것으로 전과목 종료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악동들이 기분 좋은 듯 소리쳤다.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건지 자리에서 일어서서 넥타이나 블레이저를 휘돌리는 학생도 있었다. 크루웰은 그 광경을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다가 소리쳤다.
“앉아라! 날뛰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겠지? 시험 결과가 좋지 않은 Bad Boy들은 윈터 홀리데이를 보충 수업으로 헛되게 만들어 줄 테니 각오하고 있도록. 그럼 해산.”
크루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에이스가 소리쳤다.
“이야―! 끝났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남은 건 결과를 기다리는 것뿐인가.”
“후후, 이 몸에게는 이 따위 테스트, 쉽다구!”
자랑스럽게 외치는 그림을 유키가 흘겨보았다. 오늘 아침까지 벼락치기 했던 건 누구더라? 그러나 굳이 무안을 줄 이유도 없었기에 유키는 다만 입을 다물었다. 그러므로 그림의 말에 반응한 사람은 유키가 아닌 에이스였다. 에이스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응? 너 항상 필기시험 이후에는 하늘 무너진 얼굴 했으면서, 이번엔 되게 자신 있다?”
“헤헹~ 오늘의 이 몸은 지금까지와는 다르다고. 이제부터는 ‘대천재 그림 님! 공부를 알려주세요!’라고 말할 준비나 해!”
“그런 말 할 수 있는 날 오면 좋겠네. 이번에도 내가 이기면 그림이 한 달간 담화실 청소하는 거 어때?”
유키가 장난스럽게 그림을 놀렸다. 그림이 “유키나 그 말 후회하지 말라구!” 하고 빽 소리쳤다. 듀스가 귀를 막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유감이지만, 그림. 이번에는 나도 질 자신이 없다. 담화실 청소 힘내고.”
“왜 내가 담화실 청소하는 게 기정사실이 되어 있는 거야?! 듀스 너는 낙제나 하지 말라구!”
듀스의 발언에 그림이 삿대질하며 왁왁댔다. 에이스를 제외한 1-A의 바보 트리오는 사실 항상 낙제점에서 조금 위의 점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에이스와 유키는 대충 비슷한 성적을 받을 한 사람과 한 마수를 질린 눈으로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뭐, 이번에는 나도 여유로웠으니까, 쟤네들한테 질 거 같진 않네.”
“다들 공부 열심히 했구나? 나만 쏙 빼놓고.”
“아, 미안하다니까, 유키이⋯⋯.”
에이스가 손을 모으고 사과하는 시늉을 했다. 유키는 흥, 하고 세 바보에게서 아예 고개를 돌려 버렸다.
“됐어. 나는 마지프트 부 구경이나 갈래. 에펠이 빗자루 태워준댔거든.”
“에엑―! 유키, 나님 졸려서 마지프트 같은 거 못 본다구!”
“그림한테 따라오라는 얘기 안 했어.”
유키의 냉랭한 목소리에 그림이 하늘 무너지는 소리라도 들은 듯 충격받은 표정을 했다. 갑자기 차가워진 분위기에 듀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유키는 생각보다 뒤끝이 있는 타입이구나.”
“그래. 치사하게 시험 기간 내내 사람 하나 따돌려 놓고 이 정도도 안 할 거라고 생각했어?”
“아, 진짜 미안하다고. 뭐 하면 화 풀어줄래?”
“글쎄? 너희들이 ‘왜’ 나 빼고 놀았는지 말해주면, 이유 듣고 생각해 볼게.”
“윽⋯⋯.”
그 말에 셋 다 입을 열지 못했다.
‘그야 그렇겠지.’
그림이 계약을 했다면 저 둘이 안 했을 리가 없다. 애초 셋이 공부한다는 것도 유키에게 아즐과 계약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였으리라. 그렇게 짐작한 유키는 셋을 흘겨보다가 짐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희들도 동아리에 얼굴이나 비치러 가. 그림은 잘 자고.”
그림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준 유키는 도도한 발걸음으로 교실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홈룸이 아직 끝나지 않은 B반 안을 기웃거리는 유키를 그림이 울상으로 쳐다보았다. 그림이 제 눈치를 보는 것에 마음이 그리 편치 않았지만, 유키는 그 감정을 애써 무시했다.
그림도 마음고생 좀 해 보라지. 흥.
*
1학년 B반의 홈룸은 항상 늦게 끝나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옆 복도를 살펴보니 바보들은 자기들끼리 안절부절 못해하다 결국 동아리 활동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을 무시하고 B반의 복도 창문 앞에서 기다리자 홈룸이 끝나고 지친 얼굴의 에펠이 큰 키의 사바나클로 학생과 함께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유키가 에펠을 보고 밝게 웃으며 머리 위로 손을 크게 흔들었다.
“에펠!”
“에, 유키?”
“나 오늘 매지컬 시프트 부 구경 가도 돼? 시험도 끝난 김에.”
에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아는 평소의 유키는 절대 이런 제안을 먼저 할 사람이 아니었다.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게 해준다는 제안을 해야 생각 정도나 해 보는 친구였는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러는지 알 수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곧 에펠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1-A반의 바보 트리오가 시험 기간 내내 유키를 따돌리고 있었으니까. 시험기간이 끝난 이후에 뻔뻔히 들러붙는 데에 질렸을지도 모른다.
‘그림마저 자기를 소외시켰으니까 외롭기도 하겠지.’
복도 너머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그림의 뒷모습을 보니 반성은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반성을 한다는 사실이 유키가 그들을 용서할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에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에펠은 자신과 관련 없는 싸움에 끼어들거나 굳이 누군가의 편을 드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번 건에서는 유키의 편에 서기로 했다.
“그래. 같이 가자. 안 그래도 동아리 하러 가려던 참이었어.”
“와, 진짜? 에펠, 진짜 고마워!”
유키가 에펠의 손을 붙들고 활짝 웃었다. 누가 봐도 기뻐 보이는 예쁜 웃음이었다. 속도 없이 즐거워하던 유키는 옆에서 고까운 시선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키가 크고 선탠한 피부가 멋진 사바나클로 학생이 유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키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땡그랗게 뜨고 그 시선을 받아치다가, 다시 방긋 웃으며 에펠에게 질문했다.
“에펠, 저건 네 친구야?”
“같은 반 학우…라고나 할까.”
“교내 연애는 금지되어 있다만.”
“하?”
낮은 목소리에 유키가 인상을 찡그렸다. 학교의 홍일점으로서 누군가에게 연애적 관심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유키도 알고 있었다. 방긋 웃어주기만 해도 쉽게 오해받을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알았다. 그렇지만, 에펠과 유키는 유명한 친구 사이 아니던가? 학기가 시작할 때부터 폼피오레 기숙사장에게 대들다 친해진 것을 모르는 사람이 이 학교에 아직도 있다니. 유키가 눈을 땡그랗게 떴다.
“이게 무슨 소리야? 에펠이랑 나는 사귀는 사이가 아닌데?”
“그러면, 그런 친밀한 스킨십은.”
“손 잡는 것 정도로 연애하게 되는 거야? 그럼 에이스랑 듀스는 이미 결혼식까지 올렸겠네? 이렇게 고루할 줄이야! 혹시 에도 시대에서 왔어?”
“에도 시대? 그건 또 뭐야?”
모르는 단어까지 써 가면서 삿대질하는 유키 때문에 에펠의 친구는 무척 당황스러워 보였다. 키도 작고 왜소한 몸집의 여자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유키에게 화를 참을 마음은 없었다.
“남녀가 붙어만 있어도 연애하는 걸로 보는 연애 뇌냐고 묻는 거야!”
“아니, 그렇지만, 너무 가까워 보이길래…… 미안.”
“사과는 받아줄게. 에펠이랑 친한 건 맞으니까.”
유키가 도도한 목소리로 톡 쏘았다. 유키가 제 반 친구에게 다다다 쏴대는 것을 가만 지켜보던 에펠이 웃으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하하, 잭은 그런 일들에 관심이 별로 없어서 그럴, 까나. 그러고 보니 유키는 잭이랑 처음 만나지?”
“응. 정말이지, 처음 만나는 사이에 제멋대로 착각해서 그런 말을 하다니! 너무해.”
“미안하다고 했잖아…….”
멋쩍은 듯 시선을 피하는 잭에게 유키가 생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아무튼, 나는 A반의 유키 화이트. 너는?”
“나는 B반의 잭 하울…… 아니, 나는 왜 태연스럽게 자기소개나 하고 있는 거지?”
잭은 무심코 내민 손을 잡았다. 유키가 가볍게 악수하고 잭의 손을 놓아주었다. 잭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말에 유키가 도끼눈을 떴다.
“뭐야. 불만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니다만…….”
“아하하, 유키도 너무 그러지 마.”
에펠이 나서서 두 사람 사이를 중재했다. 유키가 잭을 흘겨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신에 좀 있다가 내 고민 상담 좀 들어주기야.”
“그런 건 그냥도 해줄 수 있는데.”
에펠이 멋쩍게 웃었다. 유키의 고민이 무엇인지 짐작이 간 탓이었다. 아마 잘 지내던 A반의 바보 셋이 왜 갑자기 유키를 따돌리는지에 관한 고민일 테다. 유키가 무엇을 질문할지도 모르고 에펠은 고개를 끄덕였다.
*
매지컬 시프트 부의 훈련은 생각보다 강도가 높았다. 빗자루도 탈 수 없고, 디스크를 제대로 던질 만한 근력도 없는 유키는 부원들이 훈련하는 모습이나 빤히 쳐다보았다.
“이건 또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 털뭉치도 떼어놓고.”
“그래도 덕분에 다들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네여, 시시싯.”
“어, 레오나 선배. 라기 선배. 안녕하세요.”
1학년들이 단체로 훈련하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자니 레오나와 라기가 유키 쪽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유키는 다시 에펠이 날아다니는 걸 빤히 쳐다보았다. 하늘 위 에펠은 무척이나 자유로워 보였다.
‘나도 마법을 쓸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유키가 우울한 생각에 빠지려는 것을 아는지, 라기가 말을 걸어 왔다.
“마침 잘됐네여! 이거 좀 도와주시면 안 됨까~?”
“아, 네.”
라기가 스포츠 드링크 분말을 유키에게 내밀었다. 유키는 커다란 물통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이 스포츠 드링크는 훈련을 마친 부원들에게 한 잔씩 돌아갈 테다. 남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드니까 기분이 좀 나아졌다.
라기와 유키가 드링크를 다 만들자 1학년들이 비행술과 디스크 패스 연습을 마친 듯 경기장 바닥에 착륙했다. 유키는 드링크 중 하나를 에펠에게 가져다주며 말을 걸었다.
“고생했어, 에펠.”
“아냐. 심심했지? 그래서, 고민이라는 게 뭘, 까나?”
“그게 말이지…… 그림이 이상한 계약 같은 걸 한 것 같아.”
“그림이?”
스포츠 드링크를 마시던 에펠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유키는 인상을 찌푸리며 제 추리를 떠들었다. 시험기간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에이스와 듀스, 그리고 그림이 유키를 따돌리기 시작했다. 2학년의 곰치 인어 형제들에게서 이상한 접근이 있었고, 이런저런 사건을 겪다 보니 아즐 아셴그로토와 그 셋이 ‘계약’을 한 것 같다는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그림이 나한테도 몰래 계약을 한 것 같아. 왜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걸까?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 걸까?”
“음, 그건 너무 간 것 아닐, 까나.”
에펠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유키는 입술을 삐죽였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그렇지만 에펠! 나도 그런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단 말이야. 그림이 나보다 왜 그 선배를 믿는지 모르겠어.”
“나는 잘 모르겠지만…… 그림에게도 사정이 있는 거 아닐까?”
“어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가까운 곳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레오나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전말을 자세히 듣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레오나는 무언가를 깨달은 눈치였다. 레오나가 중얼거리며 라기에게 눈짓했다.
“작년의 그건가.”
“맞는 것 같죠? 올해도 하는군여. 그 사업.”
“무슨 사업이요?”
“네가 알 것 없는 일이다. 정 궁금하면 학원장에게라도 물어보든가.”
레오나가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뭔가 아는 티를 잔뜩 내 놓고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것이 고까워 유키가 레오나를 흘겨보았다.
“맨입으로 알려주시진 않겠다는 말씀이시네요.”
“당연한 일이지. 초식동물은 몰라도 되는 일이 있는 법이라고?”
“저도 낡은 기숙사의 제대로 된 감독생이거든요?”
“그래. 그러면 혼자서도 ‘제대로’ 전말을 알아낼 수 있겠지. 힘내고.”
영혼 없는 응원을 하고선 레오나는 가버렸다. 유키는 반박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레오나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라기가 레오나를 따라가기 직전 유키에게 한마디 했다.
“뭐, 어차피 일주일 뒤면 알게 될 검다. 시싯.”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라기는 레오나를 뒤쫓아 뛰어갔다. 영문 모를 말만 잔뜩 들은 유키는 에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에펠은 자기도 모른다는 뜻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유키는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생각했다.
‘이 학교, 도대체 왜 분기마다 일이 터지는 거야……?’
*
라기의 의미심장한 말과는 달리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험이 끝난 뒤의 일주일은 그야말로 평화롭게 흘러갔다.
“어이, 멈춰, 그림! 오늘은 절대 안 봐 줄 거야!”
“헤헹, 그렇게 말하면 멈추겠냐구~!”
‘아니, 완전히 평화롭게 흘러갔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지.’
유키 화이트는 교실 안에서 술래잡기를 하는 에이스와 그림을 피곤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런 일도 한두번이어야 말릴 기운이 나는 법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네가 잘했네 내가 잘했네 하며 싸워대는 걸 보고 있으면 그냥 ‘기운 좋네.’ 정도의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 녀석들은 질리지도 않나 봐.”
“그러니까 말이야. 또 뭐 때문에 싸우는 거야?”
듀스의 중얼거림에 유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림과 에이스는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치중이었다. 유키가 씩씩대는 에이스를 쳐다보며 질문했다. 에이스는 잔뜩 약이 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유키! 너, 감독생이면 그림 관리 좀 해! 이 녀석, 또 내가 사 둔 크림빵을 훔쳐 먹었단 말이야!”
“또? 그림. 간식이라면 기숙사에서 가져온 게 있잖아?”
“그건 벌써 다 먹었다구! 그리고 훔친 게 아니라! 책상 위에 떨어져 있는 걸 주워 먹었을 뿐이라구!”
“보통 책상 위에 놔둔 건 떨어져 있는 거라고 안 하거든!”
에이스가 그림에게 소리쳤다. 특기인 바람 마법을 사용하려는 듯 매지컬 펜을 고쳐 잡고 그림에게 겨눴다. 그림 또한 지지 않고 불을 내뿜으려는 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에이스와 그림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싸움을 시작하려는 건 매번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유키는 침착하게 두 사람 사이에 섰다.
“둘 다 적당히 해―!”
외치는 목소리가 상당히 컸다. 유키가 에이스를 흘겨보자 에이스가 멋쩍은 표정을 하며 메지컬 펜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아, 역시 마법은 그만둘래. 또 벌로 창문 청소하게 되면 귀찮고.”
“헤헹, 너도 가끔은 멀쩡한 말 하잖아? 나님만 마법 쓰는 것도 치사하니까 이번만 봐 주겠다고!”
“⋯⋯어?”
유키와 듀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이스와 그림이 마법으로 싸우다가 교실이 새까맣게 탄 것만 해도 이미 한 손으로 세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말려지지도 않아서 학원장이 달려오기까지는 멈추지도 않았고.
“웬일이래? 너희들이 싸움을 그만두고.”
“별로, 크림빵 정도로 너구리랑 싸우는 게 바보 같잖아? 애초에 그냥 유키한테 하나 사달라고 하면 되고. 유키. 사 줄거지?”
에이스가 유키에게 눈을 찡긋거려 보였다. 유키가 에이스를 빤히 보다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키가 받는 생활비 장학금은 풍족하게 쓸 수 있는 금액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친구에게 빵 하나 못 사 줄 금액도 아니었다. 그림의 간식이 하나 줄어들긴 하겠지만 그림도 ‘나쁜 짓을 하면 그만한 대가를 치른다’라는 법칙을 알 때도 되었다.
“와-앗. 진짜 사 주는 거야? 그렇게 무리할 필요는 없는데?”
“이번에는 그림의 간식비에서 뺄 거니까 괜찮아.”
“뭐야?! 너무한다구!”
그림이 빽 소리를 질렀다. 유키가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림을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유키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어느덧 시간은 수업이 시작되기 3분 전, 수업 준비를 위해 크루웰 선생이 교실에 도착했다. 떠들고 있던 학생들도 크루웰이 반에 들어오자 입을 다물었다. 교탁 앞에 선 크루웰이 그 모습을 보며 픽 웃었다.
“오늘도 활기차구나. 강아지들. 수업 시작하기 전이지만 이 몸이 오셨는데도 떠들고 있진 않겠지?”
유키가 그림을 연행하듯 안아 들고 에이스에게 “좀 있다가 점심 시간에 봐.”라며 제 자리로 돌아갔다. 유키가 떠나자 에이스와 듀스도 제 자리에 앉았다.
“좋아. 착하게 앉아 있도록. 모두 착석하면 성적표를 나눠주지.”
모두 기대하는 것이 있는지 떠들던 것을 멈추고 빠르게 자리에 앉았다. 문제아들이 많은 1-A반 학생들이 이렇게 일사분란하게 지시에 따르는 것은 담임인 크루웰으로서도 처음 보는 일이었다. 크루웰은 헛웃음을 지으며 출석번호를 불렀다. 성적표를 받은 학생들이 비명인지 환호성인지 모를 소리를 질렀다.
그림도 그 중 하나였다.
“이것 보라구, 유키! 나님, 평균 85점이야!”
“뭐어?! 거짓말하지 마! 그림 너, 항상 낙제였잖아!”
“뭐라구우?! 보라구 유키! 내가 유키한테 거짓말 같은 걸 왜 하냐구!”
그림이 화가 나서 방방 뛰며 제 성적표를 팔락거렸다. 그림의 성적표를 용케 받아든 유키는 놀라움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항상 낙제점이거나 낙제를 겨우 면할 정도의 점수였던 그림의 점수가 이상하리만치 올라가 있었다. 이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때쯤, 크루웰 선생이 다시금 말했다.
“너희들, 이번에는 꽤 열심히 한 것 같더군. 쪽지 시험과 비교해보면 이상할 정도로 평균이 올랐어. 특히 마법 약학 시험은 3개 학년 전부가 평균 90을 넘겼고, 트레인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마법의 역사도 꽤 좋은 성적이었다지?”
각자의 성적에 만족하고 있던 학생들이 깜짝 놀랄 말이었다. 시험은 공부에 들인 각자의 노력을 평가하기 위해 시행되는 것으로, ‘모두가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은 나쁜 일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그 노력의 정도를 평가하기에 좋은 일은 아니었다.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는 학생들의 평가로 절대평가를 채용하지 않는다. 등수를 왜 매기겠는가. 냉정하게 말하자면 더 우수한 학생과 덜 우수한 학생을 골라내려 그러는 것이다. 그러나 변별력 없는 시험이라도 시험은 시험. 크루웰 선생이 말을 이었다.
“성적 우수자인 상위 50명은 복도에 이름이 게시되어 있으니 기대하도록. 그럼 수업을 시작하지. 교과서를 펼쳐라.”
“시험 끝났는데도 수업인가요?”
“Bad Boy! 그럼 뭐, 중학생 때처럼 편안하게 영화나 볼 줄 알았나? 아쉽게도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는 그런 곳이 아니야. 당장 교과서를 펴도록!”
학생들은 제각기 불만을 꿍얼거리며 교과서를 펼쳤다. 유키도 지정된 페이지를 펼쳤다. 그러나 평소처럼 수업에 집중할 수는 없었다. 마법약학 시험 평균이 90점이 넘는다는 소리에 그림이 많이 불안해 보였기 때문이다. 유키는 불안을 숨기지 못하는 그림을 흘긋흘긋 쳐다보았다. 그림이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 범위의 사고라면 좋을 텐데⋯⋯.
*
수업이 끝나자마자 그림은 날듯이 성적 우수자 목록이 붙어있다는 게시판 쪽으로 달려갔다. 유키가 “그림, 안 돼!” 따위를 외치며 돌발행동을 하는 그림을 쫓았다. 에이스와 듀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그 뒤를 천천히 따랐다.
“역시 평균 90점 이상이면 50등 안에는 여유롭게 들었겠지?”
“어, 없어! 나님의 이름, 안 들어가 있어―!”
저 앞에서 그림이 비명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안해진 에이스와 듀스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아까 전 세 명이 점수를 비교해 보았을 때 그림의 점수가 가장 낮았지만, 그림의 점수도 낮은 편은 아니었다.
게시판 앞은 학생들로 바글바글했다. 성적 우수자 목록을 확인하러 온 학생들이었다. 인파를 뚫고 들어간 에이스와 듀스는 성적 우수자 목록을 확인하고 아까 전의 그림처럼 비명을 질렀다. 성적 우수자 목록에는 이름 옆에 전교과 총점이 적혀 있었는데, 상위 30명이 만점이었다. 충격적인 결과를 마주한 에이스와 듀스는 인파를 다시 뚫고 나와 일단 그림과 유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유키는 조금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껏 해온 것의 총합을 따지면 장학금은 타겠지만, 30명 이상이 만점이라니. 시험 공부를 성실히 해 온 유키의 체감으로는 그리 쉬운 시험도 아니었다. 시험기간에 도서관에 있는 학생들은 중간고사와 다르지 않았다. 처음 보는 자습서로 공부하는 사람이 몇 있었을 뿐이다.
“역시 조금⋯⋯ 이상하지 않아?”
벤치에 앉은 유키가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유키의 옆자리에 앉은 그림이 울상으로 유키의 팔에 들러붙었다. 그림은 곧 울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것보다⋯⋯ 나님, 어떡하냐구.”
“계약 건 말이지?”
유키가 톡 쏘았다. 그림이 고개를 들자 유키가 그림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엣?! 유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냐구!”
“모를 줄 알았어?”
유키가 힘없이 말했다. 옥타비넬의 쌍둥이가 그렇게 계약을 종용했는데 모를 리가. 계약의 상세한 내용까지는 모르지만, 계약 같은 것이 오가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듀스가 깜짝 놀라 유키의 어깨를 붙들고 질문했다.
“유, 유키도 그 사람이랑 계약한 거야?”
“아, 안 했어! 할 리가 없잖아! 그런 계약.”
유키의 대답을 듣고도 듀스는 여전히 절망적인 표정이었다. 그러다 여자아이의 어깨를 억지로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듀스가 황급히 유키에게서 떨어졌다. 유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듀스를 보고 있었다.
“듀스.”
“미, 미안! 유키! 그게⋯⋯.”
“아니, 그것보다 듀스. 너, 머리에!”
듀스의 머리에 푸른 형광 말미잘이 자라 있었다. 아직 상황파악을 못한 듀스가 제 머리를 더듬어 보았다.
“으악! 머리에 말미잘이!”
“에이스의 머리에도 자랐잖아!”
“유키~! 어떡하냐구!”
바보 트리오의 머리에 말미잘이 자라 있는 것을 발견한 유키는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리에 말미잘이 자란 채로 안절부절 못하는 세 바보들의 모습이 웃기기도 했지만,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계약을 불이행하면 저런 꼴이 되어버리는 거야?’
계약 안 하기를 잘했다. 유키는 팔에 닭살이 돋는 걸 느끼고 제 팔을 문질렀다.
“너희들⋯⋯.”
“시끌시끌하다 싶어서 와 봤더니, 너네였냐? 뭐 하고 있어?”
“잭, 너도 계약을⋯ 말미잘이 안 자라 있다고?!”
유키의 말을 자른 사람은 B반의 잭이었다. 유키에게 미안하다는 뜻의 눈인사를 한 잭이 인상을 찡그렸다.
“시끄러워. 그것보다, 너희들 머리에 그거, 뭐냐?”
“이건, 뭐냐면⋯ 으악! 아파!”
말미잘에 관해 설명하려던 세 바보들이 머리에 자란 작은 말미잘에 끌려가듯 움직였다. 머리가 뜯기는 것 같다며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유키의 눈에는 더없이 바보 같았다. 잭도 비슷한 감상인지 중얼거렸다.
“정말 멍청한 모습이네.”
“잭. 쫓아가보자.”
“뭐? 왜 나까지?! 나와는 상관없잖아?”
“혹시 무서운 거야?”
유키가 눈에 힘을 주고 잭을 노려보았다. 도발하는 것이라기에는 너무 올곧은 표정이었다. 짜증스러운 표정이기도 했다.
“누가 겁쟁이라고?”
“친구들 머리에 말미잘이 자랐잖아! 한 번 봐주는 것도 싫다는 게 겁쟁이지 뭐야?”
“저런 녀석들 친구로 둔 적 없어!”
“아,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뭐, 뭘 할 건데?”
유키가 갑자기 어지러운 듯 휘청거리며 머리를 짚었다. 잭은 눈을 의심했다. 분명 아까 전까지 눈을 뾰족하게 뜨고 노려보더니 갑자기 이렇게 아플 수 있는 건가? 고향에 있을 동생들은 아직 어려 갑자기 아픈 일이 자주 있었다. 고등학생이면 이제 그렇게 어린 나이도 아닐 텐데, 갑자기 이렇게 쓰러지거나⋯…
“아아, 마지프트 대회에서 생긴 상처가 쑤시네⋯⋯. 어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그럴 리 없지 않은가!
유키는 한 달도 전의 일을 우려먹는 중이었다. 매지컬 시프트 대회를 관람하다 잭이 잘못 쳐낸 디스크에 맞았던 일 말이다. 한 달도 더 전의 일이라 이제는 간지럽지도 않을 텐데, 유키는 아픈 척하다 잭과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었다.
“내 ‘친절한 친구’ 잭 하울 군이 말미잘들을 따라가는 걸 도와주면 싹 나을 것 같은데⋯⋯ 아아, 아파라⋯⋯.”
“칫⋯⋯! 치사하게! 너, 이 학원에 너무 심하게 적응한 거 아니냐? 알았다. 알았어. 같이 가 주면 될 것 아니야!”
잭이 고개를 흔들었다. 유키가 생글생글 웃으며 바보 트리오가 사라진 방향으로 먼저 걸었다. 걸어가는 말미잘 좀비들이 몇 더 있었으므로 길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유키와 발맞춰 걸어주던 잭이 투덜거렸다.
“나는 이 현상의 원인이 뭔지 궁금할 뿐이야. 별로 너나 그 녀석들을 위해서는 아니라고.”
“아아, 머리가⋯⋯.”
“어이, 그건 미안하다니까! 아무튼 착각하지 마!”
어쩌다가 이렇게 치사한 녀석의 부탁을 들어줘야 하게 됐는지! 잭이 짜증스럽게 제 머리를 헤집었다.
* *
말미잘 좀비들은 거울사로 하나하나 들어가고 있었다. 거울사 안으로 들어가자 말미잘에 조종당하던 좀비들이 “이번엔 절대로 50위 이내에 들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학교 생활의 미래가!” 따위의 비명을 지르며 하나의 거울 앞에 줄을 서 있었다. 어느 기숙사의 거울인지는 인파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유키는 어떤 기숙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당연히 옥타비넬이겠지.’
생각하고 있던 차, 잭이 말미잘 좀비들의 숫자에 놀라 소리쳤다.
“뭐야?! 바보 트리오 외에도 머리에 말미잘을 단 녀석이 잔뜩 있잖아!”
“저 사람, 2학년 선배 아니야?”
“3학년도 있는 것 같아. 아무래도 작은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도 가 보자.”
잭과 유키는 줄 마지막에 서서 줄이 줄어들기를 기다렸다. 말미잘들이 주인의 부름에 최대한 빨리 응하려 해 줄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잭은 다른 기숙사에 가 본 적 있어?”
“남의 기숙사에 갈 일이 뭐가 있지?”
“나는 가끔 하츠라뷸이나 폼피오레에 놀러가곤 하는데, 기숙사들 분위기가 다 달라서 말이야. 옥타비넬도 사바나클로와는 많이 다를걸?”
유키가 그리 말하며 옥타비넬으로 통하는 마법 거울을 통과했다. 일전 한 번 와 본 아름다운 물 속 정경이 곧 보였다. 햇볕이 비치는 얕은 바다 안에 에어 돔이, 그 안에 복도와 옥타비넬 기숙사 건물이 있었다. 잭이 해저라는 점에 놀라서 외쳤다.
“오오, 물 속에 기숙사가 있어! 역시 대단해!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
“옥타비넬에 처음 와 봐?”
“⋯⋯큼. 다른 기숙사의 영역에 들어와 있어. 조심하는 게 좋을걸.”
“나도 알아. 잭이나 들뜨지 마. 옥타비넬 사람들, 다 무지 무서우니까.”
유키가 픽 웃으며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잭은 유키를 따라가며 제 반에 있는 옥타비넬 학생을 떠올렸다. ‘옥타비넬 사람들은 모두 무섭다’라고 말하기에는, 순한 친구였다. 제법 계산속을 채울 줄 알긴 했지만 그건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 학생인 이상 당연한 일이고.
유키는 언제 아픈 척했다는 듯 당당한 걸음걸이로 걸었다. 이미 옥타비넬에 와 본 것처럼 발걸음이 거침없었다.
“야, 유키. 너 옥타비넬에 와 본 적 있나?”
“응. 플로이드 선배 때문에 반강제로.”
“안내를 부탁하고 싶은데.”
“안내라고 할 것도 없어. 모스트로 라운지까지는 그냥 저 좀비들 따라가면 될 걸.”
유키가 톡 쏘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말미잘에게 머리채를 붙들려 끌려가는 멍청한 모습을 따라가면 곧 모스트로 라운지가 나올 테니까.
“그것보다, 엄청난 수네.”
“100⋯⋯ 아니, 200명 가까이 있는 것 같아. 게다가 이 장소는⋯⋯ 카페 같군.”
“그러니까, 한 학년 전체에 가까운 사람들이 여기 모였다 이거지.”
유키가 불퉁하게 말했다.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의 한 학년의 학생 수는 대략 200명. 상위 50명을 제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2학년과 3학년들도 아즐의 족보 장사에 넘어가 계약했다는 뜻이다.
‘나름 명문고라면서, 그림만큼이나 바보인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대부분의 말미잘이 도착했는지 어둑어둑하던 카페의 중앙 조명이 켜졌다. 화려한 등장을 연출하는 핀 라이트에 시선이 절로 그쪽으로 집중되었다. 유키도 반사적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빛 아래에 아즐 아셴그로토가 서 있었다.
“이런, 이런. 성적 우수자 상위 50명에서 벗어난 불쌍한 여러분. 「모스트로 라운지」에 어서 오세요.”
유키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그래도 성적 우수자 상위 33위거든요. 잭은 모르겠지만.’
“모두 저에 관한 것은 아~주 잘 알고 계시겠지만, 다시 자기소개를 하겠습니다. 저는, 아즐 아셴그로토. 옥타비넬의 기숙사장, 신사들의 사교장 「모스트로 라운지」의 지배인. 그리고⋯⋯.”
유키가 팔짱을 끼고 아즐을 노려보았다.
‘네, 아셴그로토 씨가 속물적인 사람이라는 것까지 아주 잘 알고 있죠!’
속으로 대답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늘부터, 당신들의 「주인」이 될 남자입니다.”
“⋯⋯뭐라고?”
잭이 당황한 얼굴로 핀 조명 아래의 아즐을 쳐다보았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주인이 된다니, 신분제가 폐지된 지 오래인 휘석국 출신인 잭으로서는 잘 와닿지 않는 말이었다. 이 시대에 노예제라도 도입하겠다는 건가? 당황하여 유키를 쳐다보자, 유키는 ‘이제 어디까지 하나 보자’ 하는 얼굴로 아즐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들은, 저와 승부를 해서 패배했습니다. 계약에 명시된 대로, 이제부터 졸업까지 제 노예로서 몸이 가루가 되도록 일해주세요.”
“잠깐 기다려! 이런 건 사기잖아!”
인파 속에 묻혀 있던 에이스가 손을 들고 외쳤다. 아즐이 에이스의 얼굴을 보고 픽 웃었다.
“분명 당신은, 하츠라뷸 소속의 1학년 에이스 트라폴라 씨. 사기라니요, 남이 들으면 오해하겠습니다. 저는 계약대로 당신에게 완벽한 족보를 드렸을 터. 제대로 임했다면 평균 90점 이상의 점수는 당연히 받았을 테죠.“
“그래. 제대로 받았어, 평균 92점.”
“좋은 소식이군요! 도움이 되어서 다행입니다.”
“하지만, 족보를 받은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는 말은 못 들었다고!”
말미잘 좀비 사이에서 원성이 터져 나왔다. 당연한 일이다.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는 절대평가를 채용하지 않는다. 모두가 90점 이상이면 85점 이상을 받아도 낙제점 때와 등수가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모두가 족보를 받았더라면 모두가 50등 안에 들 수 있을 리가 없다며 말미잘들이 항의했다. 모스트로 라운지 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유키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한숨을 쉬었다. 옆에 있는 잭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쳐 제게 집중시킨 이후 질문했다.
“잭은 이거,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하기는. 여기에 모인 모두가 게으르고 불성실한 놈들이라는 생각밖에는 안 드는데.”
그 말에 순식간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모두의 주의가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아즐이 파안대소하며 두 사람을 보았다.
“아하하! 그래요. 맞습니다. 이번 기말고사에서 제게 의지한 여러분의 사정은 다양했죠. 저는 계약서 127조에 적힌 비밀 유지 조항 그대로, 당신들이 ‘어떤 이유’에서 ‘어떤 계약’을 했는지 ‘보호자’가 요구하지 않은 이상 남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여기 모인 자식들 모두 마음에 안 들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잠깐 기다려줘. 잭. 그래, 계약 조건이 뭐였는데요? 아셴그로토 선배.”
유키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앞으로 걸어나갔다.
“아, 고물 기숙사의 고고한 감독생 씨 아니십니까. 지금은 스탭 미팅 중입니다. 방문이라면 라운지의 오픈 시간에 부탁드립니다.”
“낡은 기숙사의 감독생으로서 요청하는 거예요. 계약의 조항을 알려주세요.”
“뭐, 이제는 말하는 게 어렵지 않죠. ‘기말고사 대책 노트를 주는 대신에 그의 ’자랑스러운 능력‘ 하나를 맡긴다. 성적 우수자 상위 50인 이내에 들면 능력을 반환하고, 졸업까지의 모든 테스트 대책 노트를 준다.’ 그러나 만약 50인 안에 들지 못한다면⋯⋯.“
“말미잘 인어로 만든다, 뭐 그런 건가요?”
“푸핫! 졸업까지, 제게 절대 복종하는 하인이 되는 겁니다. 그런 바보 같은 짓, 제가 할 리가 없지요?”
아즐의 조롱에 유키가 이를 악물었다. 그래서 오늘 그림과 에이스가 마법으로 싸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유키가 고개를 홱 돌려 두 사람과 한 마수를 노려보았다.
“유, 유키!”
“그림. 너만은 내가 구해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러나 유키는 차갑게 고개를 돌려 아즐을 쳐다보았다.
자업자득이야. 그림.
“처분은 뜻대로 하세요.”
“에, 유키?!”
“시험 기간 내내 감독생 몰래 계약 같은 걸 하고 그걸 감추느라 거짓말을 한 바보 고양이 같은 건 몰라.”
“유키!”
그러나 유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키 옆에 서 있던 잭이 화난 채로 외쳤다.
“외부인이고, 내부인이고 그런 건 몰라! 나는, 자기 실력으로 제대로 공부한 녀석들과 똑바로 경쟁해서 이기고 싶었다고! 그게, 당신 때문에 허사가 되었다는 거야!”
“잭! 도와줄 거야?”
듀스가 희망에 차 외쳤다. 그러나 잭은 듀스를 노려볼 뿐이었다.
“도와주겠냐? 여기 있는 모두가 마음에 안 든다는 뜻이야! 거래를 제의한 녀석도, 다른 녀석에게 의지한 너희들도, 어느 쪽 편도 들 생각 없어!”
“그럼 대화는 여기까지로 할까요. 거기, 당신. 두 분을 거울사까지 에스코트해 드려요.”
“네, 기숙사장!”
지명받은 옥타비넬 학생들이 유키와 잭을 데리고 모스트로 라운지를 나갈 즈음이었다.
“나님, 잭의 말에 깨달았어! 실력으로 승부하자! 아즐에게 실력 행사로 계약서를 빼앗아서 찢어버리면 다 무효인 거잖아!”
그림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키는 그런 그림을 말리려 몸을 돌렸지만 옥타비넬 학생에게 가로막혔다. 유키가 급한 대로 외쳤다.
“그림! 또 무모한 짓 하지 마!”
“됐어! 유키도 밉다구!”
유키는 충격에 눈을 크게 떴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말미잘 무리들이 아즐과 리치 형제들에게 유린당하는 것을 보고서도 못박힌 듯 서 있어서, 잭이 유키를 끌고 나가야만 했다.
“어이, 유키!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다!”